문화가 주는 위로 <2> - 아라리오 뮤지엄(동문 모텔Ⅱ)

▲ 산지천 옆에 위치한 동문모텔Ⅱ의 전경

이별하는 예술가 커플의 엉뚱한 생각으로 시작된 박물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별 사연이 모인 곳

사람들의 기억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있다. ‘이별하면 왜 물건을 태울까? 남겨도 되잖아’라는 이별한 커플의 엉뚱한 발상으로 시작된 전시는 그들이 이별 후 남은 물품과 친구들의 사연을 받아 자그레브 컨테이너에서 첫 전시를 시작했다. 전시는 뜻밖에 대성공이었다. 비극적 탄식을 불러일으킨다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앞에서도 감동하지 않던 관람객들이 단 몇 줄의 편지에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지중해 바다가 보이는 크로아티아에서 평화의 섬 제주로 날아온 박물관은 산지천 옆에 자리한 ‘실연에 관한 박물관(아라리오 동문 모텔Ⅱ)’이다.

박물관의 시초는 10여 년 전 두 남녀가 그들이 동거하던 부엌에서 헤어짐을 말했던 때부터였다. 동거의 부산물인 "공동 소유 물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논의하다가 “전시하는 형태로 보관하면 어떨까”로 이어진 것이다. 결국 그 생각들이 발전해 크로아티아의 한 아트쇼에 정식 프로젝트로 제출하고 지금까지 3000여 점이 넘는 이별의 이야기들을 수집해 왔다. 어떻게 보면 조각가와 영화 프로듀서인 두 예술가 커플의 가장 예술적인 이별이라 할 수 있겠다.

10년 전부터 시작돼 파리에서 멕시코시티에서 35개국을 돌며 전 세계 이별을 담은 ‘실연에 관한 박물관’은 동문재래시장과 산지천 사이에 있던 동문모텔을 인수하고 개축해 지난 5월 5일부터 국내 첫 전시를 시작했다. 전시를 위해 모인 사연은 총 82개(제주에서는 16개의 사연이 들어왔다). 그 중 67개의 사연과 물건이 크로아티아에서 온 물건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전시되지 못한 사연은 아라리오가 발간한 동명의 책에 수록돼 있다). 이별에 관한 박물관을 계획했던 크로아티아의 조각가 드라젠 그루비시치(47)와 영화 프로듀서 올링카 비스티카(47)도 어느새 47세의 나이를 맞아 각자의 가정을 꾸린 채 비즈니스 파트너로 동행하고 있다.

전시는 ‘그 사람을 위한 작은 박물관’, ‘사랑의 위성’, ‘그대여, 안녕’, ‘가지 않은 길’이라는 주제로 분류돼 4개 층에 나뉘어 전시 중이다. 이별의 대상이 ‘연인’이나 ‘이성’같은 타인일 필요도 ‘사람’일 필요도 없다. 그래서인지 전시는 남녀 사이의 헤어짐, 세상을 떠난 부모님, 배우자의 사별, 이전의 모습에서 벗어난 나 자신 등 개인적인 이야기뿐 아니라 제주 4·3 사건 등 사회적인 이슈를 아우르는 사연들까지 다채로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누군가의 로빈

“로빈을 잃어버린 배트맨. 그녀에게 로빈 열쇠고리를 주면서 “우리는 배트맨과 로빈처럼 영원한 파트너”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떠났고, 더 이상 배트맨과 로빈은 파트너가 될 수 없습니다. 배트맨은 홀로 그 자리에서 꿋꿋이 잘 견뎌낼 것입니다. 또 다른 로빈을 기다리며”

-로빈을 기다리며, 대한민국, 서울

앞서 소개했던 <반 고흐 인사이드: 빛의 축제>보단 생소한 박물관일 수 있다. SNS를 통한 홍보도 하지 않았고 이목을 끌만한 큰 이벤트도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자칫 지나갈 뻔했다. 하지만 올해 2월 지인이 “내 이야기가 세계를 돌면 재밌을 것 같다”며 아라리오 사연 접수를 추천했다. 그런데도 정작 바빠서 접수하지 못했지만 사무실, 영화관, 모텔 등으로 사용되던 건물들이 현대 미술관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리고 사연을 접수했던 지인은 선정돼 그의 사연이 엽서로도 출시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렇다. 그는 위 사연에 나오는 로빈을 기다리는 배트맨이다. 익명으로 이뤄지는 전시의 특성을 위해 그의 신상을 더 밝히지는 않지만, 그는 여전히 서울에 살고 있으며, 또 다른 로빈을 기다리고 있다.

▲ 실연과 관련된 물품들이 뮤지엄 안에 전시돼 있다.


◇우린 모두 이별한다

“우리는 스코틀랜드에서 만났다. 그가 먼저 다가왔었다. 나는 불편했다. 그가 명함이 없다며 브라질 지폐에 그의 메일 주소를 적어주었다. 그가 다만 쿨해 보이고 싶어서 그러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남부로 내려왔다. 친구들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그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는 내 지폐를 많이 가져갔다. 아주 많이 가져갔다"      -결혼도, 지폐도 영국, 런던

먼저 간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할아버지의 편지부터 사랑했던 사람이 애 딸린 유부남이라는 사실에 분개해 써 놓은 고소장. 성적 판타지를 가지고 있던 여자친구의 가발. 바람난 남자친구가 사준 지스트링 티팬티. 수능을 마치며 이별한 수학의 정석.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이별이 존재했다.

비극적 탄식을 불러일으킨다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앞에서도 감동하지 않던 관람객들이 단 몇 줄의 편지에 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뭘까?

대부분 사람들이 이별의 경험 앞에서 보편적 아픔을 겪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반적인 우리가 천재들의 불후의 명작에서 느꼈던 감동보다 다 해진 편지를 보고 더 감동하는 이유일 것이다. 또한 우리는 공유된 기억을 보며 ‘남들도 다 그래’라는 자그마한 위로를 받으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우린 이미 어떤 형태의 이별을 겪었고 또다시 겪을 것이다.

아라리오 뮤지엄에 전시된 실연의 기억들은 9월 25일 되면 떠나야 한다. 파도를 타든 하늘을 날든 어디든 내달려가 누군가의 심장을 잘게 부수든 뛰게 하든 어떠한 형태로든 만들 것이다. 마치 박물관의 사연처럼.

전시의 마지막 방에는 자신의 이별을 경험을 남길 수 있는 노트와 펜이 있었다. 노트를 펼치니 누군가 무심히 써 놓은 메모가 보인다.

“사랑했으니 됐다.”

그래. 우리 사랑했으니 됐다.

한편 제주시 산지로 23에 있는 아라리오 뮤지엄(동문 모텔Ⅱ)은 매주 월요일 휴관이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한다. 마지막 전시장 입장과 입장권 구매는 오후 6시까지이며 실연에 관한 박물관은 9월 25일까지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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