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3년 제주 해안에 난파 … 13년 동안 억류됐다가 탈출
제주목사 이익태가 쓴 ‘지영록’ 1997년 한글판 출간 후
표착지 안덕 용머리해안 vs 대정 신도2리 해안 ‘논쟁’

2017년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2리 해안에 세워진 ‘하멜 일행 난파희생자위령비’.
2017년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2리 해안에 세워진 ‘하멜 일행 난파희생자위령비’.

 

1653년 8월 16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선 스페르베르호가 일본으로 가던 중 거센 풍랑을 만나 제주 해안에 난파됐다. 

당시 승선원 64명 가운데 28명이 익사했고 나머지 36명은 조선에 억류됐다. 제주에 표착한 후 13년 동안 억류됐던 이 배의 서기였던 헨드릭 하멜(1630~1692) 등 8명은 일본으로 탈출했다. 하멜은 고국으로 돌아가 조선에서 겪은 경험담을 기록한 ‘하멜표류기’를 남겼다. 유럽에 조선을 알린 최초의 자료다.

하멜은 당시의 상황을 담담히 기록했다.

‘암스테르담 출신의 레이니어 에흐버츠 선장이 팔베개를 하고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해변에 밀려왔을지도 모르는 식량을 찾아 나섰다. 밀가루 한 포대와 고기 한통, 베이컨 한통, 스페인산 붉은 포도주 한통이 발견됐다. 포도주는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아주 유용했다. 우리에게는 불이 가장 필요했다.’이 기록에서는 유럽의 붉은 포도주가 이 땅에 처음으로 소개됐다는 점과 선장이 사용했던 은잔과 두 개의 쌍안경이 제주도 관리들에게 전달됐음을 보여줬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총독은 선량하고 사리를 잘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70세 전후로 도성 출신이었고, 조정에서도 상당히 존경받는 분이라 했다. 그는 국왕에게 장계를 올려 우리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은지를 묻고 그 답서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알려 주었다.’여기서 말하는 총독이란 제주목사 이원진이다. ‘효종실록’에는 이원진이 조정에 올린 기록이 남아있는데, 하멜 일행을 ‘길리시단자’라 말하고 ‘낭가삭기’로 가는 중이라 답했다 적고 있다.

‘길리시단’(吉利是段)이란 크리스천(카톨릭)을 믿는 자로 일본어 ‘기리시탄’에서 온 말이다. 반면에 ‘낭가삭기’(郎可朔其)는 동인도회사의 상관(商館)이 열려있던 일본 나가사키를 의미한다. 하멜과 이원진의 기록을 비교해보면 대체로 사실에 부합한다. 

이 표류기는 살아남은 하멜 일행이 관원에게 체포된 경위를 비롯해 제주, 한양, 강진, 여수 등지로 끌려 다니며 겪은 군역, 감금, 태형 등을 소상하게 담고 있다. 

부록인 ‘조선국기(朝鮮國記)’에서는 당시 지리, 풍토, 경치, 군사, 교육, 무역 등에 대해 하멜이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했다. 하멜 일행은 제주에서 10개월 동안 감금됐다가 한양으로 호송됐으며 전라도 여수에서 유배 도중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한 뒤 고국인 네덜란드로 귀국했다.

귀국 과정에서 하멜 일행은 동인도회사가 있던 바타비아(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먼저 도착했다. 하지만 동인도회사 관리들은 하멜 일행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하멜 일행은 13년 동안의 밀린 급료를 달라고 요구했으나 동인도회사는 냉정하게 묵살했다. 입증자료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보고서 형식으로 정리했는데, 보고서 제목이 ‘1653년 바타비아발(發) 일본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였다.

당시 보고서가 책으로 출판되면서 대대적인 화제와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서귀포시는 하멜 표착 350년을 기념해 2003년 8월 16일 안덕면 용머리해안에 하멜상선전시관을 설치했다. 이곳에는 스페르베르호를 재현한 상선 모형을 세워 관광지로 조성됐다.

이보다 앞서 용머리해안에는 1980년 한국국제문화협회라는 단체와 네덜란드의 역사문화재단이 제주도 등의 후원을 받아 표착 기념비를 세웠다.

그런데 2017년 해양탐험문화연구소와 하멜기념사업회, 신도2리마을회는 2017년 대정읍 신도2리 해안에 스페르베르호 난파 당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하멜 일행 난파희생자위령비’를 세웠다. 이들 단체는 하멜 일행의 표착지가 그동안 알려진 안덕면 용머리해안이 아니라 대정읍 신도2리 해안이라고 주장했다.하멜 일행 표착지에 대한 논란은 그동안 지속됐다. 

1694년부터 2년 동안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가 쓴 ‘지영록(知瀛錄)’이 1997년 한글로 번역, 출간되면서 하멜 일행의 표착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됐다. 지영록은 하멜 일행의 난파 지점을 ‘차귀진하 대야수연변(遮歸鎭下 大也水沿邊)’으로 기록했다. 

국립제주박물관이 2003년 마련한 ‘항해와 표류의 역사’ 특별전에서 대야수연변은 대정읍 신도리에서 한경면 고산리 한장동 사이 해안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대야수포’는 원래 고산 한장의 대물(또는 대아물)의 한자 표기로, 고산 한장과 도원에서 대물을 길면서 논깍포구를 대야수포(大也水浦)로 불렀으나 19세기 이후는 지도상에 돈포(敦浦)로 표시돼왔다.

2014년 하멜기념사업회 등은 지영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멜 일행의 이동거리와 시간을 분석하고 현장을 답사한 결과 표착지를 신도2리 해안으로 규정했다.

하멜표류기와 지영록의 난파 날짜(8월 16일)가 같고, 신도2리에서 본 녹난봉과 한라산이 겹쳐 보이는 풍경이 하멜표류기의 삽화와 일치하는 점 등도 신빙성을 더한다고 사업회는 밝혔다.

용머리해안에 하멜기념비가 세워진 이유는 하멜표류기에 ‘정오를 지나 그간 머물고 있던 해안가를 출발해 4마일을 걸어서 저녁 전에 대정현청에 도착했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머리해안은 대정현청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가 6㎞가량 떨어져 하멜표류기 내용과 얼추 비슷하다고 보고 기념비를 설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증을 통해 새롭게 등장한 표착지인 신도2리 해안은 대정현청에서 서쪽으로 8㎞가량 떨어져 있다.

하멜 일행의 표류 기록은 제주목사 이익태의 ‘지영록’과 이원진의 ‘탐라지’ 등 여러 문헌에 실렸지만 정확한 표착지가 특정되지 않아서 지금도 용머리 해안과 신도2리 해안을 놓고 주장이 갈리고 있다.

2003년 서귀포시 안덕면 용머리해안에 설치된 하멜상선전시관.
2003년 서귀포시 안덕면 용머리해안에 설치된 하멜상선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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