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동척이 설립, 고구마로 항공기 연료 생산
제주4ㆍ3 당시 수용소로 이용… 열악한 환경 희생 잇따라
제주도, 50억원 들여 4ㆍ3역사기념관과 도심공원 조성

제주주정공장은 79년 전인 1943년 제주시 건입동 제주항 인근에 조성됐다. 우리나라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고 경제권 이득 착취에 앞장섰던 일제의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했다.

공장은 4만3685㎡ 부지에 건축연면적 7580㎡ 규모로 신설됐다. 내부는 상부와 하부로 구성됐다. 

현재 건입동 현대아파트에 있었던 공장 상부는 고구마 창고와 분쇄실, 저수탱크를 갖췄다. 인근에 있는 용천수인 ‘지장깍물’을 1일 1만3000t을 끌어다 썼다. 하부는 공장시설과 주정탱크, 50m 높이의 굴뚝이 솟아있었다.

공장에서는 ‘절간 고구마’(속칭 빼떼기)를 발효해 주정(酒精ㆍ알코올)을 생산했다. 알코올을 원료로 항공연료인 부탄올과 아세톤을 생산해 일본군에 납품했다. 1944년 말에는 제주에 주둔한 일본군의 자동차 연료를 공급하기도 했다.

주정공장은 일제의 전투기 연료 보급을 위한 생산기지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당시 물을 함유하지 않은 알코올(무수주정:無水酒精)을 일본 전역에 공급하는 동양 최대의 시설이라고 자랑했다. 고구마를 발효한 후 증류하면 95% 농도의 알코올을 얻을 수 있는데 물로 희석하면 소주가 된다.

‘주정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나야 제주경제가 돌아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정공장은 광복 전후 제주지역 최대의 산업시설이었다. 600여 명의 종업원들은 연간 1만4940㎘의 알코올 원액을 생산했다. 발전기 3대는 연간 4만2000t의 무연탄을 소비했고, 매일 1400㎾의 전력을 생산해 공장을 물론 건입동 일대 가옥에도 전기를 공급했다.

공장 간부였던 홍성무씨의 증언에 따르면 공장 상부와 하부를 잇는 통로 계단 중간에 인공동굴로 된 방공호를 설치했는데 사계절 내내 12도를 유지하면서 냉저장고로 이용했다고 밝혔다. 옥상에는 대공 감시를 위해 큰 종을 달았고, 미군의 공습 시에는 경보를 울렸다. 

또한 산지항(현 제주항)에서 공장 상부까지 레일을 깔아 고구마와 무연탄을 운반하는 시설도 갖췄다. 산지항을 통해 상ㆍ하역되는 화물의 50%는 주정공장에서 나올 정도로 규모가 컸다. 한 때 미군 전투기의 공습으로 공장 일부가 파괴돼 가동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주정공장이 들어서면서 제주지역 농가에서는 고구마를 얇게 썰어 볕에 말린 ‘절간 고구마’를 생산했다. 공장에서는 당시 한 관(3.75㎏)에 30원을 주고 수매를 했다.

1945년 태평양전쟁 말기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고구마 공출을 강요, 농민들을 괴롭혔는데 강제수탈이나 다름없었다. 광복 후 주정공장은 미군정이 접수했고, 창고에 보관된 고구마를 배급해 도민들의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줬다.

1950년대 주정공장은 민간이 운영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소비되는 소주와 공업용ㆍ의약용에 필요한 알코올 원액을 공급했다. 공장 자체에서도 알코올 도수 30%인 소주를 제조해 도내에 공급했다. 소주 이름은 ‘만수주’였다. 1959년 부산대선발효공업㈜이 운영할 당시 냈던 세금은 제주도 총 납세액의 50%를 넘을 정도로 제주에서는 가장 잘나갔던 기업이었다.

공장은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다가 오폐수 처리와 고구마 구입 문제로 조업이 자주 중단됐다. 1989년 공장의 상징인 굴뚝이 해체돼 지금은 공터로 남았다.

그런데 이 공장은 제주4ㆍ3사건 당시 양민들의 생과 사를 갈라놓으면서 현재는 비극의 장소로 각인됐다. 군ㆍ경 토벌대는 1948년 11월 중순부터 이듬해 3월초까지 중산간 마을을 불태우고, 민간인을 강제로 구금한 후 집단 학살하는 초토화작전을 전개했다.

초토화작전이 극에 달하면서 수용시설이 부족해졌다. 토벌대는 주정공장 10여 개 창고를 임시 수용소로 사용했다. 공장 시설이 크다보니 4ㆍ3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도내 최대의 수용소가 됐다. 수용소하면 주정공장을 가리킬 정도가 됐다. 

토벌대는 오름과 동굴이 산재한 중산간지역으로 피신해 배고픔과 추위에 떨고 있었던 입산자들에게 ‘내려오면 살려준다’며 선무공작을 펼쳤다. 이 선무공작에 의해 1949년 봄부터 산에 숨어있던 많은 도민들이 하산했다. 이들은 무자비한 토벌을 피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산에 숨어있었다. 

1949년 3~5월까지 남자 2974명, 여자 3040명 등 모두 6014명이 귀순했다. 이 가운데 3000여 명이 주정공장에 수용됐다.

1949년 5월 주정공장을 방문한 UN한국위원단은 여자가 남자보다 3배 이상 많았고, 간난 아기와 어린이들도 있었다고 보고했다. 임신부도 수용돼 아기를 낳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중 청ㆍ장년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거나 학살터에 끌려가 집단 총살을 당했다. 더구나 수용소로 쓰였던 주정공장에서는 고문 후유증과 열악한 수용환경으로 죽어 나가는 사람이 속출했다. 

1949년 10월 육군 군법회의는 민간인 249명에게 사형을 선고하면서 수용소에는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징역형을 선고받은 청년들은 육지 형무소로 끌려갔고, 이들 중 대다수는 6ㆍ25전쟁 직후 집단 학살을 당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2010년 주정공장 수용소 터를 매입했다. 제주도는 4ㆍ3당시 최대 규모 수용소로 쓰였던 주정공장 옛터에 조성되는 역사기념관의 명칭을 전국에 공모했다.

주정공장 옛터는 대표적인 4ㆍ3유적지로 ‘가슴 뜨거운 울림’을 주요 컨셉으로 역사기념관과 도심공원이 조성되고 있다. 제주도는 총 사업비는 50억원을 투입해 연말까지 공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주정공장 옛 터에서 행방불명 희생자를 기리는 진혼제가 봉행된 모습
주정공장 옛 터에서 행방불명 희생자를 기리는 진혼제가 봉행된 모습
1943년 건립된 제주주정공장은 일제가 항공연료 보급을 목적으로 설치했다. 50m 높이의 굴뚝은 해방 전후 도내 최대의 산업시설임을 보여주고 있다 
1943년 건립된 제주주정공장은 일제가 항공연료 보급을 목적으로 설치했다. 50m 높이의 굴뚝은 해방 전후 도내 최대의 산업시설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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