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하다. 아무도 거리에서 죽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청춘의 한때가 그렇게 무참히 저버릴 까닭도 없었다. 철없는 치기도 아니었고, 주최 측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세월호 참사의 트라우마를 겪었던 아이들이, 그때 살아남은 스물의 아이들이 다시 죽음의 공포 앞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하는 국가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침묵의 애도’가 아니라 ‘책임의 추궁’이다. 뒤늦은 후회로서의 애도가 아니라 어른으로서, 한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비통의 무게를 오롯이 짊어져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이자, 공동체의 고통을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비통의 무게다. 

그래서 물어야 한다. 따져야 한다. ‘희생자’가 아니라 ‘사망자’라고, ‘참사’가 아니라 ‘사고’라고 말하는 그 무책임한 언어의 진원지를 찾아야 한다. 일선 경찰의 무능만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애통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해야 할 국가가 과연 무엇을 했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애도의 계엄령’만 난무하는 회피의 정치를 애도의 극장에서 끌어 내려야 한다. 세간의 비통을 외면하며 시민적 애도를, 광장의 촛불을 ‘정치적 비난’으로 치부하는 세력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 지금의 슬픔을 뭉치고, 뭉쳐, ‘단단한 짱돌’로 돌려줘야 할 때다. 공감은커녕, 애통의 몸짓조차 가식적인 권력에 우리의 분노를 던져야 한다. 

비겁하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도, 경찰청장도 여전히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의 뻔뻔한 처사를 그대로 두는 임면권자 역시 마찬가지다. ‘죄송하다’라는 사과의 말은 수사로 끝나서는 안 된다. 정치적 언어에는 책임의 무게가 얹어져야 한다. 그 무게가 없는 언어는 한없이 가볍다. 

여당은 ‘세월호 트라우마’를 떠올리며 벌써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어깃장이다. 심지어 문재인 전 대통령의 책임이라고까지 말한다. ‘검수완박’ 탓이라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말은 그야말로 아연실색이다. 이러려고 정권을 잡았는지, 이러려고 권력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지 묻고 싶다. 그들에게 과연 국민은 누구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더 많은 정치적 언어다.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더 많은 광장에서 외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는 ‘정치인’들만의 몫이 아니다. 일상으로서의 정치, 삶의 정치는 ‘더 많은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다. 젊은 생명들의 죽음 앞에서 그 죽음의 까닭을 묻는 이유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통의 무게 앞에서 농담이나 하는 ‘정치’를 끌어내릴 힘은 시민의 정치에만 있다. 그것이 진정한 애도의 정치이자, 비통의 연대이다. 그 무게를 오롯이 감당하지 못하는 권력이라면 차라리 권좌에서 내려오라. 시민의 힘으로, 시민의 연대로 마땅히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 87년 항쟁부터 촛불항쟁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살아온 역사가 바로 그 증거이다. 울음의 힘으로 울음을 극복해 온 시민의 힘을 우리의 몸이 기억하고 있다.

삼가 이태원 참사로 유명을 달리한 분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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