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 역사, 만주에 가다 <중> 조국의 광복을 위해

▲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대성중학교

중국 동북3성 본보 해외 취재

2016년 7월 10일부터 18일까지 8박9일간 철기이범석 기념사업회(회장 박남수 전 육군중장)에서 운영하는 광복청년아카데미에서 제11회 해외사적지 탐방이 진행됐다. 선조들이 남겼던 위대한 영토인 만주를 기자가 그들과 함께 동행했다. <편집자 주>

◇기회의 땅, 만주

단원들이 이동한 곳은 청산리 대첩비가 있는 청산리였다.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한 후 선조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연해주 등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진행했다. 조국광복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동녕, 이회영 등의 신민회 인사들이 서간도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건설했고 자치 및 경제적 자립을 목적으로 경학사, 부민단 등을 조직했다. 또한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강습소(후에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됨)를 설립했다. 북간도에서도 중광단 등 많은 항일무장단체들이 조직됐다.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떨어졌을지 생각하며 차창너머를 바라봤다.

◇총성이여 울려라. 청산리 전투

어느덧 버스는 청산리대첩비가 있는 중국 연변자치주 화룡시에 도착했다. 단원들은 청산리 마을에 도착하고 버스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대열을 맞춘 단원들은 청산리 전투에 대한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청산리 전투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등 만주 독립군 연합부대가 만주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완루구 등지에서 간도로 출병한 일본군과의 전투를 통합해 부르는 말이다.

봉오동전투 등에서 독립군에 패배한 일본군은 훈춘 사건(1920년 일본이 중국 마적을 매수해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고의로 습격하게 한 사건)을 일으켜 이를 계기로 만주에 독립군을 토벌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6일간에 전투에서 독립군은 화룡현 내의 여러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게 되고 청산리 골짜기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한다. 전투는 21일 백운평전투, 22일 천수동, 완루구 전투, 23일 맹개골 전투, 24일 천보산 전투, 26일 고동하 전투 등이 있다.

▲ 1920년 김좌진 장군이 이끈 청산리전투에서의 대승을 기념하고자 만든 청산리대첩기념비

설명을 모두 들은 후 기수들은 기념 사업회 깃발과 태극기, 오성홍기를 들고 청산리대첩비석으로 향했다. 그 순간 중국 공안들이 갑자기 길을 막아섰다. 태극기를 걸고는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전협의내용은 태극기와 함께 오성홍기를 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었는데 공안 측은 갑자기 말을 바꿨다. 단원들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태극기를 허용해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했으나 공안들은 끝까지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결국 단원들은 태극기는 물론이고 오성홍기 또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기념사업회 깃발만 들고서 대첩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준 사무총장은 계단을 오르며 중국의 외교적 보복이라고 설명했다. 한국과 중국이 사드문제로 인해 마찰을 빚자 사소한 것부터 보복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 만큼 황당했으며 분통이 터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첩비가 있는 곳은 중국의 영토였기에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대첩비에 오르니 거대한 비석이 단원들을 반겼다. 여태 봤던 독립운동 기념물 가운데 단연 으뜸이었다.

비석의 뒤쪽을 향해 걸어보니 대첩비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청산리 전투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돼 있지는 않았으나 기본적인 설명은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의문은 마지막 문장이었다. “청산리 대첩 80주년에 즈음하여 연변지역 각 민족 인민은 이 기념비를 세워 선열들의 충혼을 기리고 그 위업 천추 만대에 전하노라”며 마치 이 기념비를 연변시에서만 설립한 것으로 돼 있었다.

설립 당시 국가보훈처에서 많은 도움을 줬는데 “대한민국이 지원을 해”라는 의미의 말은 빠져 있었다. 자랑스런 역사의 순간을 보는 자리였지만 기쁨보다는 씁쓸함이 남는 자리였다.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대성중학교

버스에 탑승 후 용정시로 이동했다. 용정시에서 방문한 곳은 일제강점기 때 윤동주 등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대성중학교(현 룡정중학)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윤동주 시인의 흉상과 그의 시 ‘서시’가 적힌 시비였다. 시비 앞에서 시를 낭독했다. 책을 통해 봤었기에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의 모교 앞에서 낭독하는 시는 색다른 느낌을 줬다.

건물 2층에는 사적전시관이 있었다. 윤동주의 중학교때 사진과 화보, 책자를 비롯해 1900년대 초부터 일제강점기 동안 용정과 주변지역에서 일어났던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가 있었다. 또한 이상설 선생의 서전서숙 기념관도 있었다. 서전서숙은 용정 최초의 근대식 교육을 실시한 곳이다.

기념관 가이드는 용정중학교 교사들이 진행했다. 중국어가 아닌 조선어를 사용해 설명을 했는데 어조와 표현 등이 한국어와는 조금 달라 어색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후 망명을 한 선조들이 만주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하나씩 설명했다.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를 비롯한 일제에 항거했던 전투에 대한 설명은 물론이며 대성중학교를 졸업한 독립운동가에 대해 소개를 했다. 기념관 안에는 김일성의 업적도 적혀 있었는데 아무 생각없이 가볍게 지나쳤다. 36년간의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운동가들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외교, 군사, 학문 등 여러 부분에서 투쟁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피를 흘리신 선조들을 생각하며 전적지와 기념비 등을 직접 눈으로 보니 숙연해졌다. 그리고 한 가지 말이 떠올랐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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