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우 편집국장
고지우 편집국장

‘spec’은 ‘specification’의 줄임말로, 기계나 물건의 ‘사양’과 ‘설명서’를 뜻한다. 우리가 취업을 위해 쌓는 ‘스펙’은 ‘자격’인 ‘qualification’으로 고쳐 써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는데 학벌, 학점, 영어성적은 직무 역량을 위해 갖춰야 할 ‘자격’이 아닌, 내 ‘사양’을 요약한 ‘설명서’에 더 가깝다.

언론계는 특히 대학 간판을 중시하기로 악명이 높다. 지방대 출신 언론인 지망생들은 내세울 수 없는 학벌을 토익 고득점으로 메꾸려 한다. 대학 졸업 요건인 토익 600점을 충족하고도 900점 만들기에 돌입하는 이유다. 어째서 대학은 토익학개론도 가르치지 않으면서 토익점수를 요구하고, 블라인드 채용을 시행한다는 진보 언론사들은 토익 750점을 넘지 못한 지원자의 서류를 거부할까? 말 그대로 토익이 밥 먹여 주는 시대다.

토익 열풍의 시작은 김영삼 정권이 국가 정책으로 ‘세계화’를 선언한 1990년대였다. 토익이 진급의 기회가 되면서 토익 점수는 새로운 권력이 됐다. 550점인 탓에 출장을 가지 못해 울고, 850점인 덕분에 보너스를 받고 웃었다. 30년이 흐른 지금, 되레 확장하는 토익 사업은 숫자로 능력을 계산하는 공식의 잔재를 고발한다.

능력에 따른 대우는 어쩌면 당연하다. 애초에 능력주의는 공정을 위해 논해졌다. 가족 배경이나 물려받은 사회적 지위 등의 세습제도를 철폐하고 개인의 가능성을 보자는 취지다.    물론 평등이 전제될 때 비로소 능력주의가 실현한다. 또 다른 계급을 만든다면 실패한 능력주의고, 현실이 그렇다.

경력자를 선호하는 취업 시장에서 경력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일부 정규직 노동자가 분노하는 까닭은 기회균등이랍시고 ‘스펙’을 따지지 않는 체계가 불공정하다고 느껴서다. 불평등 능력주의가 낳은 부끄러운 결과다.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왕을 다스리는 자가 철학자여야 한다며 ‘철학’을 능력의 기준으로 삼았다. 생성과 소멸에 동요되지 않고, 실재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통치자로 활약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쾌락이나 고통에 이미 연마된 애국자임을 입증하는 방법으로 그 능력을 확인하고자 했다.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자질이고, 성적표가 말해주지 않는 역량이다.

‘spectrum’, ‘special’이란 말의 뿌리 ‘spec’은 ‘보다’라는 뜻이다. 학교든 회사든 스펙의 범위를 넓히고 개인의 특별한 능력을 ‘봐’야 진짜 유능한 사람을 뽑을 수 있다. 유럽에서는 학업을 잠시 중단하거나 병행하면서 진로를 탐색하는 ‘갭이어(gap year)’ 기간을 시간 낭비로 여기지 않는다. 그나마 공인영어성적 인정 기간이 연장된다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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