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설기/ 김광협 / 현대문학사 / 1970

제주 BOOK카페  < 26 >

호근동에서 두 해 동안 작은 책방을 운영했다.  아내의 고향이고, 공간이 마음에 들어서 선뜻 계약했다. 가게는 원래 작은 슈퍼를 했던 곳이다. 오래된 새시 문이 정겨웠다. 근처에는 30년도 넘은 분식집이 있어서 더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서점을 이전해서야 확인했다. 호근동이 시인 김광협의 고향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다. 호근동에는 김광협 시비도 있고, 시 벽화도 있다. 책방이 시집 전문 서점이니 서점 위치로는 제격이었다. 

김광협은 서울에서 기자 생활을 오래 해서 고향인 제주도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제주어 시집을 낼 정도로 그는 제주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사후에야 작고 문인 선양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시비와 문학상이 생겼다. 시집 『강설기』는 그의 첫 시집이다. 이 시집에 그의 대표시라 할 수 있는 「유자꽃 피는 마을」과 「서귀포」가 수록되어 있다. 

서점에서 시 모임을 만들어 문학회 이름을 막동산문학회라 지었다. 유자꽃 피는 마을에서 시를 쓰고, 읽었다. 시 모임은 주로 저녁 시간에 열렸다. 각자 쓴 시를 갖고 와 읽었다. 서로의 감상과 함께 밤이 깊어갔다. 

한 번은 눈 오는 날이었다. 눈이 와서 참여율이 낮을 줄 알았는데 대부분 참여했다. 열 평 남짓한 서점에 사람들로 가득했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시가 우리의 마음에 함박눈처럼 쏟아졌다. 모임이 끝나고 다들 헤어지기 아쉬운 표정이었다. 차양 아래 서서 내리는 눈을 바라봤다. 농촌 마을이라서 조용한 겨울밤이었다.

“유자꽃 피는 마을이 호근동인데 오늘은 눈꽃이 폈네요.”누군가의 말이 차갑고도 따뜻하게 들렸다.

봄이 되어 나는 작정하고 마을을 걸었다. 정말 유자꽃이 피는 마을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호근동 꽤 많은 집 마당에 하귤이 있었다. 하귤과 유자는 비슷하지만 열매 모양이 좀 다르다. 하지만 유자는 댕유지라 해서 제주도에서 예부터 약재로 쓰기 위해 마당에 주로 심던 과실수이다. 그러므로 김광협의 노스탤지어는 어린 시절부터 유자꽃 하이얗게 핀 그 유자꽃이었을 것이다.

‘강설기’는 눈이 많이 내리는 시기를 일컫는 말이다. 유자꽃 필 때는 하얀 꽃바람이 분다. 그것은 마치 눈보라 같다. 눈 내리는 소리를 “곁에 서면 세월이 머리를 쓰다듬는 소리”(「강설기」 부분) 표현한 것처럼 유자꽃 향기 역시 긴 세월 동안 이어져왔다. 머지않아 귤꽃 향기가 흩날릴 것이다.

 

저작권자 © 제주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