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ㆍ3 이후 기억의 재현을 둘러싼 갈등

진영옥 사회학과 박사과정
진영옥 사회학과 박사과정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화북 곤을동 4ㆍ3 기념비인 ‘잃어버린 마을 표석’에 대한(2003년 4월 건립) 주민들의 항의 기록을 읽게 되면서이다. 곤을동은 4ㆍ3 초토화작전 시기 1948년 12월 7일(음력) 군인들에 의하여 마을이 불태워지고, 주민들이 총살되어 바다에 버려진 이후 일부 생존자들은 이웃 화북동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현재까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4ㆍ3시기 제주 사람의 무고한 대량 학살은 해방 후 반공 국가의 신화를 만들어 내는 제의적 희생(김성례,1999)이었다고 할 수 있고, 그 배경적 원인으로는 1945년 일제강점기로부터 벗어나 미군정이 들어선 때부터 제주 땅에 ‘해방이 해방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새로운 압제와 횡포ㆍ 만행이 저질러진 점, 민족을 엄청난 위기로 몰아갈 수 있는 단선단정의 실시,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이 사태를 순리로 풀려하지 않고 초토화작전 등 강경 일변도로만 대응하였던 정책’을 들 수 있다(서중석, 1999). 

4ㆍ3사건에 대한 주민들의 기억은 주로 피난, 저항, 죽음 등과 같은 어두운 것들인데, 사건 직후에는 이런 기억들을 재현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유일한 기억의 표출 통로는 죽은 자들에 대한 유족으로서의 추모였다(정근식, 2014). 제주 사람들에게 4ㆍ3의 비정상적 죽음이 발생한 이후 추모행위로서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우는 평범한 일은 금지 당해왔다. 

2000년 1월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ㆍ3특별법)’이 제정될 때까지 4ㆍ3으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인명피해의 실체는 정권에 의해 부정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2000년 이전에는 진압작전에 나섰다가 사망한 군ㆍ경에 대한 기념비가 곳곳에 건립되었던 것과 달리, 군ㆍ경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들에 대한 추모비 건립은 용납되지 않았다. 

지역의 공동체적 기억은 국가에 종속적으로 기억되면서도 때때로 서로 충돌하면서 은밀한 반란을 꿈꾸기도 하며(정근식,  2006) 지역별로 그들만의 방식으로 4ㆍ3피해를 기념물에 표상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서 1950년 예비검속으로 학살된 상모리 섯알오름 백조일손유족들은 1960년 비석을 세웠고, 의귀리 현의합장묘비 건립은 전두환 군사정권시기인 1983년에 유족들에 의하여 자생적으로 이루어졌다.  

2000년 이전에는 제주도 내 오로지 2곳에만 유족들에 의한 집단 희생 추모 기념비가 세워졌다. 군사정권 시절 의귀리와 상모리 기념비를 세운 유족들은 경찰의 감시에 시달리면서 비밀리에 유족회 모임을 하였고, 상모리 백조일손 기념비는 건립된지 1년만에 1961년 5ㆍ;16 쿠데타 세력에 파괴되었다. 정부에서 은폐 혹은 해체의 대상으로 지목되어 국가가 부정하는 기념물이 되는 것이 있는데(정호기, 2012), 백조일손기념비는 이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백조일손유족들은 비석 건립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집단 내부에서 형성하였고 타 집단에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는데, 유족 집단의 틀을 벗어나면 기억이 사라지거나 변질되기도 하였다. 

이는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의 사회적 틀에 관한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의 이론과 일치한다. 알박스는 역사와 집단기억을 분리하려고 하였고(오경환, 2011), 집단적 기억은 복수로 존재하며, 다양한 역사들을 기술하기 위해 통합적 틀을 구성하는 역사적 기억은 단수로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2020, 알라이다 아스만(변학수, 채연숙 옮김)). 이러한 알박스의 견해를 차용한다면, 단수로 된 하나의 틀에만 담아내는 역사적 기억과 복수로 존재하는 집단적 기억들은 충돌할 수밖에 없게 된다. 

지배권력은 기억을 ‘선택’하고(전진성,2005),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하나의 잣대로 폭도들=빨갱이들=학살 공식으로 등치시키고, 지배권력이 강요하는 것과 다른 목소리는 나오지 못하게 억압하였던 것이다. 즉 대량학살이라는 죽음에 대한 진실규명의 목소리는 은폐되었던 것이다. 2000년 4ㆍ3특별법 제정까지 50여년 국가가 선택하고 강요하는 하나의 언어로만 말을 해야 했던 제주민들은 정부가 주도하는 기념의 시공간에서는 복수의 여러 목소리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말해질 수 있다는 기대를 하였을 것이다. 4ㆍ3특별법 제정 이후 국가는 가해자로서 과거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 진실규명을 하였고, 대통령은 유족들에게 2003년 공식 사과하였다. 

4ㆍ3특별법 제정 후 일련의 정부 발표로 4ㆍ3 문제가 일정 정도 해결되는 듯 하였다. 그러나 4ㆍ3특별법 제정 직후 첫 번째 기념사업이었던 ‘잃어버린 마을 표석’ 건립을 통하여 유족들은 ‘화합과 용서’ 담론을 억지로 수용해야 했다. 유족들은 정치적 기회구조의 시기임에도 ‘잃어버린 마을 표석’ 앞에서 과거 가해자들이 저질렀던 것과 마찬가지의 폭력적 행위를 다시 지켜보게 되었던 것이다. 유족들은 4ㆍ3특별법이라는 시공간에서 억압받았던 침묵을 깨고 기억을 말하려 했으나, 기억투쟁 과정에서 ‘지방정부, 지방의회, 4ㆍ3실무위원회’라는 권력집단에 의하여 밀려나게 되었다. 즉 과거 4ㆍ3 이후 폐촌된 마을을 떠나 숨죽여 입막고 살아야 했던 것처럼, 2000년 4ㆍ3특별법 제정 직후에도 유족들은 정치적 기회구조를 활용할 수 없었다.

‘잃어버린 마을 표석’ 설치 사업은 유족들의 기억을 다시 억압시키고 배제하였다.   유족들은 객체가 되어 ‘잃어버린 마을 표석’을 국가의 시혜적인 선물인 것처럼 수용해야만 했으며, 화합과 용서라는 담론이 작동되는 가운데에서, 정부의 ‘화해ㆍ상생 담론에 동원되고 억지 화해에 들러리를 서야 했다. 

이는 특별법 제정 이전 제주도의회, 지방정부, 시민사회단체, 유족회 등이 주관한 4ㆍ3희생자 합동위령제에서 유족들이 위령제의 구경꾼으로 전락하여 과거 고통을 재현하는 효과가 발생한다고 했던 맥락과 흡사하다(김성례, 1999.  그 대표적인 ‘잃어버린 마을 표석’ 논란의 예가 곤을동이다. 표석 문구 의견 청취과정에서 주민들은 문구 수정 요청을 하였으나, 제주도의회, 지방정부는 거부하였다.

이 기사가 언론에 드러나자, 제주도의회 4ㆍ3특위에서 논쟁이 발생하였는데, 특위 소속 오만식 의원은 이렇게 발언하였다. ‘내용 문구에 너무 욕심을 낸 것 같아요. 그냥 “여기(곤을동)는 4ㆍ3때 불타 없어진 마을 터입니다.”하면 될 것을 좀 복잡하게 하니까 그렇지 않습니까?’(제주도의회 속기록, 2001.3.22.). 도의회 오만식 4ㆍ3특위 의원은 유족의 고유하고 복잡한 4ㆍ3피해의 기억들을 발설치 못하도록 단순화시키고 은폐, 억압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50여년 말을 못했던 피해자들의 기억의 재현은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2001년부터 시작된 4ㆍ3기념비 건립사업을 통하여 제주도와 제주도의회 권력자들은 누가 가해자인지를 알 수 없도록(군인이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을 학살한 사실은 아무도 모르도록 은폐한 효과는 문구에 그대로 반영되었고,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 유족들에게 침묵을 종용한 것이다. 

‘잃어버린 마을 ’속에서 겨우 살아난 유족들은 보고 겪은 ‘기억’을 말하였는데, 그 ‘말’은 권력집단에 의하여 불인정되었던 것이다. 표석에는 ‘군 작전으로 양민이 희생되고 온 마을이 전소’라고 현재 새겨져 있는데, 유족들은 ‘군 작전’표현은 잘못되었고, 수정되어야 하며, ‘어느 날 갑자기 마을을 불태운’ 권력자들의 폭력을 유족의 언어로 고발하고자 했던 것이다. 

2001년 지방정부와 도의회, 4ㆍ3실무위원회는 곤을동 4ㆍ3피해를 말하는 유족들의 말을 무시하고 배제시켰으며, 유족의 언어를 삭제시키고, 권력집단의 조작으로 유족의 기억을 억압한 것이다. 3년이 지난 2003년 곤을동 표석이 설치되었으나, 문구는 지방권력자들의 언어 그대로 재현되었다.  

관제기억의 지배력과 그것에 포섭되어버린 사회적 기억들의 무게에 눌리어 전혀 목소리를 못내고 침묵하던(김영범, 2003).기억들이 제 목소리를 찾아 말을 하였으나, 그들의 언어는 2003년까지도 공식역사에서 배제된다. 2000년 특별법 한계는 4ㆍ3 역사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기보다 정부의 프로젝트로서 의도적으로 가시적인 성과의 위령사업에 치중한(고성만, 2005) 것처럼 기념비 건립 사업 또한 지나치게 화해와 상생을 강조하면서 4ㆍ3 피해자의 억눌린 입장은 고려되지 않고,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지 않은(남경우, 2018) 결과로 작동된 된 것이다.  

과거청산 작업이면서, 기억의 재현으로서 시작된 ‘잃어버린 마을 표석’ 설치의 의미는 결국, 지방정부의 실적 세우기이자, 4ㆍ3 기념사업의 획일성, 형식성을 보여준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을별로 4ㆍ3 피해의 고유성과 복잡성이 존재함에도, 이를 무시하여 피해를 단일한 형식으로 납작하게 만든 것이다. 나머지 잃어버린 마을 표석 또한 일률적으로 4ㆍ3 피해를 균질화시켜버리게 된 것이다.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지 않는 기념사업은 화해의 주체와 화해의 과정에 대한 고려가 없는 단계적 도약의 문제점을 발생시키고 4ㆍ3을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것이며(남경우, 2018), 4ㆍ3의 기억을 하나로만 말하도록 강요했던 과거로 회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곤을동 잃어버린 마을 표석.
 곤을동 잃어버린 마을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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