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봉수와 연대 63곳… 이상한 선박 출현 시 봉수 2개 올려

제주시 사라봉공원 정상에 있는 사라봉수 전경.
제주시 사라봉공원 정상에 있는 사라봉수 전경.

횃불과 연기로 해안과 국경의 안위를 특정한 신호 체계에 의해 조정에 보고한 조선은 봉수의 나라였다. 4면의 바다로 둘러싸여 사방에서 시야가 트인 제주에서도 위급상황을 제주목사에게 알려야 했다.

1439년(세종 21) 제주목사 겸 안무사(按撫使)로 부임한 한승순은 본주(本州ㆍ제주목)는 동쪽 김녕부터 서쪽 판포에 이르기까지 봉화대와 망루를 겸한 장소는 10곳이라고 밝혔다.

또 대정현은 서쪽 차귀에서 동쪽 거옥(居玉ㆍ서귀포시 하원동 구산봉)까지 5곳이며, 정의현 서쪽에서 북쪽 지말산(只末山ㆍ구좌읍 종달리 지미봉)까지 7곳이라 기록했다.

한승순은 장계를 올려 외적이 만약 상륙하면 육군으로 공격하고 수군은 협공해 잡는 것이 좋은 계책이라며 장계를 올렸다.

1679년(숙종 5) 정의현감으로 부임한 김성구가 일기체 형식으로 쓴 남천록에 따르면 황당선(荒唐船ㆍ수상한 배)이 수평선에 나타나면 횃불을 2개(낮에는 연기)를 올리고 군사들이 약속된 장소에 집결에 명령을 기다린다고 밝혔다.

1702년(숙종 28)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이 쓴 남환박물에는 사면을 둘러가며 봉수와 연대가 63곳이 있다고 밝혔다.

중앙으로 직접 통하는 직봉은 5개 노선

조선시대 봉수제도는 지역에 따라 경봉수(京烽燧), 연변봉수(沿邊烽燧), 내지봉수(內地烽燧)로 구분됐다.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로 한양 목멱산(木覓山ㆍ남산)에 있었다.

연대라고도 불렸던 연변봉수는 전국 동서남북 해안과 국경의 최전선에 설치했다. 내지봉수는 중앙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중간봉수의 기능을 수행했다.

내지봉수는 직봉(直烽)과 간봉(間烽)을 합해 1150여 기가 그물처럼 전국에 퍼져 있었다. 변경에서 중앙으로 직접 통한 봉수가 직봉이며, 그 사이 보조 역할을 한 것이 간봉이다.

전국에는 5개의 직봉노선이 있었다. 제주도는 제5로에 포함됐다. 하지만 남환박물(南宦博物ㆍ1702년)에는 한라산 중턱에 봉수대가 있어서 전남 해남까지 통보한 적도 있지만 해무가 자주 끼면서 철폐했다고 기록했다.

이처럼 봉수는 조선 600년간 국가적 기간 통신망 역할을 했다. 해안과 국경의 안위를 횃불과 연기로 특정한 신호 전달 체계에 의해 병조와 승정원에 알렸고, 최종에는 왕에게 보고됐다.

고된 삶 살았던 백성들 군역은 더 힘들었다

조선시대 봉수제는 평상시 한 번, 적선이 나타나면 2번, 해안에 접근하면 3번, 상륙하면 4번, 접전을 벌이면 5번의 횃불이나 연기를 올리는 오거법(五擧法)을 채택했다. 이 역할은 백성들의 몫이었다. 25곳의 봉수와 38곳의 연대에는 감관(監官) 1인을 두고 인근에 사는 백성 10여 명을 봉수군로 차출했다.

당시 전라도에서는 1개월마다 근무를 서는 반면, 제주는 5일 단위로 근무해 군역이 매우 힘들었다. 김상헌의 남사록(1601년)을 보면 조선시대 제주사람들이 군역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 수 있다.

자료에는 당시 제주 인구가 2만2990명(남 9530명ㆍ여 1만3460명)인데 군인은 전체 인구의 32%인 7444명으로 기록됐다. 군역을 지지 않는 양반을 제외하면 모든 남자가 군인인 셈이었다.

17세기 후반 숙종(1661~1720) 때 작성된 것으로 우리나라 군적부(병적기록부) 중에서 시기가 가장 오래된 제주속오군적부(濟州束伍軍籍簿)가 2000년에 발견됐다. 군적부는 군 소속을 비롯해 나이(年)ㆍ부모(父)ㆍ출신(係)ㆍ거주지(住)ㆍ키(長)ㆍ얼굴색(面)ㆍ수염(鬚)ㆍ주특기(藝) 등 개인별 신상을 낱낱이 기록했다.

예를 들어 3대(隊)에 소속된 공노비 정신(丁申)은 33세로 아버지는 칠금(七金), 출신은 제주, 거주지는 도근(지금의 외도), 신장은 4척(146㎝)으로 기록됐다. 그리고 주특기는 창(創)을 잘 사용한다고 나왔다. 이처럼 노비까지 신상 파악을 세세히 해가며 부과했던 군역은 녹록치 않았다. 조선시대 제주사람들은 군역뿐 아니라 온갖 노역을 감당했다.

그 중 가장 꺼렸던 일은 진상을 위해 미역을 따던 잠녀(潛女), 전복을 잡던 포작(鮑作), 말을 기르던 목자(牧子), 귤을 키웠던 과직(果直), 이들 진상품을 운반하는 뱃사람 선격(船格), 관청의 땅을 경작하던 답한(畓漢)이었다. 이들의 역을 ‘6고역’이라 일컬었을 정도였다. 18세기 후반에는 6고역에 아병ㆍ성정군ㆍ유직군 등 하위 군병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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