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장래희망에 대한 조사에 응답한 적이 있다. 그 나이 때 아이들의 상상력이란 현실과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서 대통령과 군인 등 폼나고 멋있어 보이는 직업을 선택한다. 어린이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과학자 등 직업군도 등장하고, 교사도 순위권에 항상 있었다. 최근 장래 희망을 조사하면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여 새로운 직업군이 등장한다. 

프로스포츠의 영향으로 운동선수가 상위권에 등장하고,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여 프로게이머와 크리에이터도 상위 직업군에 오르내린다. 가수나 배우 등 팬이 있는 직업을 선호하는 반면, 의사나 교사 등 안정적 직업을 선호하기도 한다.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의 장래 희망이 미묘하게 다르고 시대에 따라 새로 등장하는 직업군이 있지만,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장래 희망은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장래 희망을 적으라고 하면 장래 직업을 적었던 것일까. 최근에는 장래 희망을 희망 직업으로 명명하여 구체적으로 조사하는 듯하지만, 학생들의 미래를 직업으로 판단하는 근본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꿈이 직업인 시대를 참 오래도록 살아왔다. 학생들에게 “너의 꿈이 뭐냐?”고 묻는다면 대다수는 장래 직업으로 답할 것이고, 질문하는 어른에게도 꿈은 장래 직업을 의미한다. 막연하게 꿈이 없다는 학생의 대답에 담긴 의미 또한 아직 장래 직업이 없음을 뜻하고, 장래 직업을 정할 수 없는 현실의 각박함을 의미한다. 

꿈은 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이 직업에 머무르는 사회는 불행하다. 조선시대의 사농공상 등 직업에 대한 뿌리 깊은 서열문화는 블루칼라 계층에 대한 차별로 이어지고, 편하고 안정적인 직업에 대한 동경을 부추긴다. 부모 세대의 우대받는 직업은 세습 직업이 되어 간다. 축적한 부와 인지도에 의해 연예인이 세습되고, 교육의 질에 의해 의사와 변호사도 세습된다.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끊긴 시대는 기득권의 공고한 울타리가 세워지고, 필연적으로 사회의 양극화를 초래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심각한 저출생 문제는 신분 상승의 희망이 사라진 현실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이 상황에서 ‘꿈을 가지라’는 말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던져져야 한다. 꿈은 비전이어야 하고, 내가 원하는 삶의 목표여야 한다. ‘꿈꾸어라. 꿈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대문호 괴테의 이 말은 삶의 목표를 정하고 신념에 따라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면 이룰 수 있다는 뜻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 청년들의 삶의 목표가 단지 직업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란다. 치열한 경쟁의 틈바구니와 취업의 좁은 문에 끼어서 허덕이는 청춘에게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은 괜한 염장일지도 모른다. 누릴 것 다 누린 기성세대의 입바른 소리일 수도 있다. 그래도 삶은 직업을 넘어선 고귀한 것이고, 꿈은 꿈꾸는 자의 몫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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