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와 무기력의 시절을 지나고 있다. ‘공산전체주의’라는 시효가 끝난 언어들이 다시 등장하고, 각자도생의 악다구니로 소란하다. 그럼에도 세상은 좀 더 좋아질 것인가. 

시정의 밤거리에서, 울분에 찬 술자리에서 종주먹을 들이대는 질문들도 때론 무기력하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전진할 것이라는 오래된 믿음마저 흔들린다. 타자를 향한 손가락질이 날카로운 창처럼 번득이고, 나만 아니면 된다며, 그대의 불행이 오늘 나의 불행이 아니길 바라는 안도의 외투 안에서 겨우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악인이 아니지만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고, 죄의식에 빠지지 않을 만큼의 자기 위안들 속에서 우리들의 언어는 점점 왜소해지고 있다.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저울질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과 해도 안 되는 일들을 견주는 환멸만이 가득하다. 

난국의 시절,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더 이상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말라’고 노래하던 때가 있었다. 91년 5월의 싸움이 끝난 후였고,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패배한 즈음이었다. 진창의 날들이었지만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희망마저 버릴 수는 없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한숨을 내뱉으면서도 우리들의 시대가 역사의 계단을 향해 오를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다. 노래처럼 한 시대가 흘러갔다. 그 시절 노래를 들으며 버릴 수 없었던 결기를 다짐했던 이들도 늙어버렸다. 노래가 지난 시절의 알리바이가 아니라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사실은 형해화되었고, 모든 관계가 계약으로 치환되어 버린 오늘, ‘화려한 과거’ 따위가 도대체 무슨 힘이 있는 것일까. 그래도 세상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에는 오늘의 반동이 위태롭다. ‘공산전체주의’라는 형용모순과 ‘이념전쟁’이라는 대결과 윽박의 언어가 다시 등장했다. 

역사는 두 번 반복한다고 했는가.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비극으로. 오늘의 퇴행은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우리 역시 희비극을 관람하며 환호와 눈물을 쏟아내는 관객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무대 위에 함께 있다. 

슬로베이나의 철학자 지젝은 우리 시대의 최우선 과제를 헤게모니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했다. 운동이 아니라 질문, 행동이 아니라 방향에 대한 회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리라. 그렇다. 질문 없는 행동은 위험하며 행위 없는 질문은 무기력하다. 

김수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질문을 던지며 동시에 행동하는 것, 행동하는 질문, 질문하면서 행동하기. 그렇다 질문과 행동은 동시에 벼려야 하는 비수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우리의 행동은 어떤 질문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텅 빈 광장’을 마주했던 30년 전, ‘깃발 군중을 기다리자 말라’는 노래를 오늘 어떻게 다시 불러야 하는가. 분명한 것은 하나다. 불의한 권력은 끝내 무너진다. 무너진 권력을 밟고 깃발을 흔들 날,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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