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역사의 재발견… 제주성을 둘러싼 3일의 역사
제주연구원, ‘을묘왜변 제주대첩’ 교육 교재 발간
자랑스러운 ‘제주대첩’으로 기억될 기념사업 추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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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화북동에 위치한 별도연대 전경.
제주시 화북동에 위치한 별도연대 전경.
오현교에 세워진 을묘왜변 표석.
오현교에 세워진 을묘왜변 표석.

제주 승리 역사의 비극

큰 승리를 뜻하는 ‘대첩’은 역사 속 모든 전투에 쓰이지 않는다. 적군에게는 참패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행주대첩, 청산리대첩 등 대승을 거둔 전투에서만 붙일 수 있다. 제주에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승리 전투인 ‘제주대첩’이 있다. 조선 13대 왕 명종은 조선시대 왜구와 격하게 싸워 승리를 쟁취한 이 전투를 ‘대첩’이라 불렀다. 

1555년 을묘년,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를 습격한 후 퇴각하던 왜구는 이어 제주를 공격했다. 무방비 상태의 제주는 왜구의 기습으로 제주성에 둘러쌓여 3일 동안 처절히 싸워야 했다. 

이 당시 김수문 제주목사의 지도력을 중심으로 제주 군관민들은 치열한 전투로 왜구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 제주 유일의 승리 전투는 제주도민뿐 아니라 대부분 사람이 무지한 상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을묘왜변에는 제주가 언급돼 있지 않으며, 제주대첩을 기념하는 표석은 오현교 가장자리에 조그만지 자리 잡고 있다. 2년 뒤인 2025년은 제주대첩 승리 470주년을 맞이하지만 누가 이 전투를 기억하고 있을까.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마저 무지한 제주 승리의 역사를 어떻게 기념할 수 있을까. 

을묘년에 일어난 왜구의 해상권 장악 시도

여말선초부터 시작된 왜구의 약탈은 조선시대 제주로도 이어졌다. 일본 왜구(고려, 조선과 중국 등지의 해안 지역을 약탈하던 일본인 해적 집단)의 근거지인 규슈는 경제적으로 농업 생산력이 다른 지역에 비해 떨어졌다. 

자연스레 왜구의 수가 증가하며 약탈이 일상이 됐고 삼포왜란(1510년, 삼포에서 거주하던 왜인들이 일으킨 난)을 시작으로 1545년 명종 즉위년부터 1554년까지 총 12차례 침입하며 조선인들이 골머리를 앓게 했다. 

1555년 5월 을묘년, 왜구 약 1,000명이 40여 척의 선박으로 전라남도 남해안 쪽으로 침입하며 1차 을묘왜변이 발생했다. 진도 일대를 침략한 후 강진, 장흥, 영암 지역까지 침탈해 약탈을 자행하며 엄청난 속도로 5월 24일 영암성을 포위하고 무차별 공격을 이어갔다. 

영암성 함락 위기에 처해있을 시기 양달사 의병장과 의병들이 매복 작전을 펼쳐 극적으로 탈환에 성공했고 왜구들은 퇴각했다. 하지만 왜구들의 도착지는 자국이 아닌 제주를 향했다. 

왜구들은 곧바로 제주성을 침입해 3일 동안 대접전을 펼쳤다. 제주목사인 김수문은 70인의 효용군(군인 중에 용맹한 자를 따로 뽑아 만든 부대)을 선발했고, 김직손·김성조·이희준·문시봉 등 4인의 치마돌격대가 적진으로 돌격하자 왜구가 흩어졌다. 김몽근은 적장을 화살로 쏴 쓰러뜨렸고, 이후 제주 군민은 승세를 타 추격하며 다수의 왜구를 무찌르고 사로잡아 대첩을 거뒀다. 

제주대첩의 역사적 단절과 기억

제주연구원 현혜경 연구원은 “을묘왜변 제주대첩은 <조선왕조실록>에 분명히 쓰인 기록”이라 말하며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아쉬워했다. 그는 제주대첩 역사적 단절에 대해 “제주의 역사적인 계승이 원활하게 되지 않았다”며 “일제강점기나 4·3사건으로 인해 지식인들이 많이 죽은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분명하게도 제주대첩은 재조명할 필요가 있는 역사다. 제주 을묘왜변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제주가 처음 겪은 대규모 외적의 침입이지만 이를 대첩으로 이끌어 시련을 극복해 조선 을묘왜변의 최종적 승리로 이어졌다. 또한 해상 요충지인 제주에서 승리한 이 전투는 당대 조선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현 연구원은 향후엔 당시 국제 질서에서 제주대첩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전체 왜란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등 확장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구원은 “제주도는 침략·수탈·학살의 과거로 인해 지역사를 자긍심보단 암담한 역사로 인식한다. 제주도민에게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역사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우리가 지속해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선 기념사업이 진행돼야 한다. 기념사업을 진행하면 연구 사업ㆍ선양 사업·교육 사업이 계속 이어지고 제주대첩을 아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으로 생각한다”며 희망의 말을 전했다.

제주대첩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현 연구원은 “2018년부터 제주에서 4·3사건 관련 사상 교육이 많이 이뤄져 사람들이 4·3사건을 많이 알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4·3사건을 학살로 가르치기 때문에 역사를 마주하는 방식이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5·18 민주화운동은 민주항쟁이라 배웠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위해 불의에 저항하거나 시민군이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역사를 통해 주체적인 인식을 갖게된 경우”라고 말했다. 

하지만 제주는 달랐다. 제주 4.3사건의 경우 진상 규명 운동까지의 피나는 노력과 공동체 재건을 위한 의지를 불태웠으나 원초적인 사건을 학살로 가르쳐 피해 의식을 주입해 5·18 민주화운동과는 달리 수용의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이 연구원의 의견이다. 

교육의 초점을 어디에 맞출 것인가는 굉장히 중요했다. 현 연구원은 “제주대첩 같은 경우도 승리도 중요하지만, 그 당시 대첩에 참여한 군인, 관인, 일반 민간인 모두가 일체심이 폭발했다는 것이 더 핵심”이라며 “일심동체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닌 역사적으로 쌓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주대첩으로 배우는 제주의 미래

사학과 전공과 역사 교양을 듣고 있는 오구원(사학과 3)씨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공부할 당시 비변사 변천 과정 중 제주대첩이 짧게 언급된 것을 봤다”며 “관련 자료도 많지 않아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들도 잘 모른다”고 입을 열었다. 

그는 이어 “역사는 잊혀있던 것을 발견하고 재인식하며 자리 잡는다고 생각한다”며 “제주대첩을 포함한 잊고있던 제주의 역사를 계속해서 발굴해 제주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면 한다”고 의견을 내세웠다. 

마지막으로 “을묘왜변 제주대첩 단행본이 발간됐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제주사가 교과과정에서 관심을 두게 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며 바람을 전했다.

역사를 배우는 가장 큰 이유는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현혜경 연구원은 “과거 제주도민들은 섬에 살며 지속해서 침입하는 외부 세력, 척박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며 많은 부침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겹게 살아온 자신들의 의지와 표상으로 오늘날이 있다”며 “제주도민이 가고 있던 삶의 의지라는 부분을 지금 망각하는 것 같다. 새로운 전환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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