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과 섬 사이 / 정인수 / 고요아침 / 2017

제주 BOOK카페 <31>

고등학교 1학년 때 문학부에 가입했다. 문학부 이름은 ‘창(窓)’. 수요일마다 한 교실에 모였다. 가끔 졸업생이 오기도 했는데 한 선배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권했고, 어떤 선배는 변진섭의 노래 <너에게로 또다시>를 불렀다.

농협 강당 같은 곳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하이라이트는 문학의 밤이었다. 각자 창작시를 낭독했다. 나는 이병우의 기타 연주곡 <머플리와 나는 하루 종일 바닷가에서>를 BGM으로 사용했다. 읽었던 시는 기억나지 않고 그 음악만 그 뒤로도 가끔 듣기에 기억에 오래 남았다. 그리고 그때 창밖에 드리워진 땅거미를 기억한다.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했다. 그 애가 선배랑 다정한 모습을 보고 나는 애꿎은 깡통만 발로 찼다. 그래도 그 애 때문에 시를 썼다. 너와 나의 계절이 있었다. 강정천으로 소풍도 갔다. 은어 몇 마리가 발목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마 이른 여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해군기지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그 추억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때 문학 선생님은 정인수 시인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제주서림에 가서 선생님의 시집 《삼다도》를 샀다. 당시 유행하는 시와는 다른 절제와 격조가 있었다. 특히 시 <원당봉 통신>이 마음에 들었다. 원당봉과 비슷한 별도봉에서 떠나는 카페리를 보며 상념에 젖던 나였으니 공감이 됐다. 제주 바다 근처에 있는 봉우리는 봉수대가 있던 곳인데, 편지처럼 어떤 통신수단이 되어 표현하는 이미지가 나에시의 전형으로 남았다.

영화 <변산>(이준익 감독, 2018)에서 시를 쓰던 문학소년은 래퍼가 된다. 문학소년들이 모두 래퍼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시가 덜 외로울까. 래퍼라고 해서 모두 스타가 될 수 없다. 무명 래퍼나 무명 시인이나 비슷한 처지인 것 같다.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영화 속에서 문학을 꿈꾸던 고등학생의 시 일부다. 교생 선생님이 이 학생의 시를 훔쳐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우리는 고향의 풍경을 훔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인수 선생님은 가끔씩 수업 시간에 명상을 하도록 했다. 바닷가에서 밀려오는 파도나 오름 위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는 상상을 해보라고 했는데, 다시 눈을 뜨면 세상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넥타이 대신 펜던트를 매고 있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정인수의 시집 《삼다도》는 언제였는지 잃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앤솔로지 시집이 있다. 가을 맑은 날에 바닷가 벤치에 앉아 읽으면 윤슬 같은 흔들림이 시집에서 물결을 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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