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연구원이 교육 교재로 발간한 에 수록된 삽화.
제주연구원이 교육 교재로 발간한 에 수록된 삽화.

468년 전인 1555년(명종 10년) 을묘년 5월. 왜구는 70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를 침략했다. 달량포(해남군 북평면)로 침입한 왜구는 진도ㆍ강진ㆍ장흥ㆍ영암 일대에서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았다. 

왜구는 총통을 다룰 줄 알았고 명령 체계가 잡힌 정규군이나 다름없었다. 출병한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은 왜구에 포위돼 전사했다. 영암군수 이덕견은 포로가 되는 등 전라도 곳곳이 큰 피해를 입었다. 조정은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과 남치근을 방어사로 임명해 왜구 토벌의 임무를 맡겼다.

이준경은 전주부윤 이윤경과 함께 영암성을 거점으로 삼아 적진을 무너뜨렸고, 왜구들은 퇴각했다. 왜구들은 본거지로 돌아가지 않고 제주도로 방향을 돌렸다. 1555년 6월 21일 왜선 40여 척은 제주 앞바다에서 1리(392m) 쯤에 닻을 내리고 정박했다. 제주목사 김수문의 장계가 조정에 보고됐다.

을묘왜변 제주대첩의 서막이 열렸다.1000여명의 왜구는 그해 6월 27일 제주의 관문인 화북포로 상륙한 후 곧바로 제주성으로 쳐들어왔다. 왜구는 성 밖 민가를 불태운 뒤 지금의 제주시 동문로 동남쪽과 사라봉 사이의 높은 언덕에 진을 치고, 제주성 동문을 내려다보며 화살을 쏘아댔다.

김수문 목사는 70인의 효용군(驍勇軍ㆍ용맹스런 군인)을 선발, 선제공격을 감행해 적진으로 쳐들어갔다. 뒤이어 김직손ㆍ김성조ㆍ이희준ㆍ문시봉 등 4인이 말을 타고 적진으로 돌격하자 왜구는 무너지고 흩어졌다. 

김몽근은 붉은 깃털을 단 투구를 쓴 적장을 활로 쏘아 넘어뜨렸다. 제주 군민(軍民)은 승기를 잡고 추격해 왜구들을 물리치며 대첩을 거두었다. 김수문 목사는 군관 강려에게 명령해 바다로 쫓겨 나간 왜선을 총통으로 공격했다. 왜구들은 물에 빠져 죽었고, 적선 9척을 나포했다.

명종은 제주성을 지켜낸 목사와 판관의 품계를 올려주고, 군관 강려는 등급을 건너뛰어 대정현감으로 승진시켰다.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왜구를 추격해 큰 공을 세운 목사 김성조는 종3품 건공장군(建功將軍)이라는 파격적인 벼슬을 제수했다.

조선 건국 이래 200년 동안 외적의 침입이 없었다. 그런데 대규모 왜구의 침략은 제주에 큰 위기였고, 이러한 시련에 제주인은 일심동체로 협력했고, 뛰어난 궁술과 기마술로 왜구를 무찔러 대승을 거뒀다. 제주성을 본거지로 삼으려 했던 왜구가 침략하자 제주인들은 목숨을 걸고 대항했다.

을묘왜변의 승전보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자세히 기록됐다. 명종실록(1555년 7월 7일)에는 ‘수성파적(守城破賊)’이라며 영암의 수성, 제주의 파적이라 기록했다. ‘파적’(破賊ㆍ적을 깨뜨린다)은 제주인들이 왜구를 물리쳤다는 뜻이다. 을묘왜변 이후 조정은 천ㆍ지ㆍ현ㆍ황 대형 총포를 본격적으로 개발했고, 군선인 판옥선을 건조했다.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연구원은 지난 9월 22일 제주시 아스타호텔에서 ‘을묘왜변과 지역사회 대응, 역사문화자원화’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세미나는 강만생 제주도 문화재위원장의 ‘잊혀진 제주의 첫 승전사, 제주을묘왜변 재조명과 역사성’ 기조발표에 이어 △을묘왜변과 영암의 대응 △을묘왜변과 제주의 대응 △역사문화자원의 문화원형 및 콘텐츠 발굴 순서로 진행됐다. 

을묘왜변으로 제주성이 왜구에 함락됐다면 조선 본토 중앙군이 파견되기 전까지 피해는 엄청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와 중국, 일본을 연결되는 해상 요충지인 제주가 왜구 수중에 들어갔다면 동북아시아 정세에 큰 지각 변동도 초래할 수 있었다. 

홍기표 전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겸임교수는 ‘제주 을묘왜변의 재조명과 역사적 의의’를 주제로 발표했다.

홍 전 교수는 “을묘왜변은 조선 최초 대규모 외적 침입이었고, 제주민은 이를 대첩으로 이끌어 시련을 극복했다”며 “이는 비단 제주만의 승리가 아니라 조선의 승리로 귀결된다. 이 점에서 오늘날 을묘왜변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부여, 크게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을묘왜변 대첩은 유능한 목사 김수문과 김직손, 김성조, 이희준, 문시봉, 김몽근 등 군민이 일심동체로 전투에 나섰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조선왕조실록에 ‘사졸(士卒)이 한마음이 돼 방비에 힘썼기 때문에 왜적을 물리쳤다’고 기록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대첩은 평상시 철저한 군비 관리와 관민의 일심동체로 이뤄졌으며, 거기에 효용군 70인 및 4인의 돌격대 등 강인한 용기가 수반돼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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