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우 편집국장
고지우 편집국장

‘이 도시에선 멍때리는 것조차도 사치/ 버릇처럼 내가 나를 착취해’

최근 역주행의 신화를 다시 쓴 가수 다이나믹 듀오의 노래 <AEAO>의 가사 일부다. 주옥같은 가사들 사이에서 하필 이 구절이 귀에 꽂혔다. 정말 이 도시에선 멍때리는 것조차도 사치인가?

10시 전공 수업, 13시 팀플 회의, 17시 인터뷰…. 마치 퀘스트를 깨야 하는 강박에 시달리는 게임 유저처럼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느 틈에 멍때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어떤 날은 먼저 멍때릴 핑곗거리를 찾기도 한다. 일부러 돌아가는 버스를 타는 일이 그중 하나다.

멍때리기는 왠지 모르게 안도감을 준다. 고민에 빠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땐 나지막한 시냇물 소리를 틀어두고 생각을 비운다. 흥미로운 점은 나처럼 단순히 ‘멍때리기’를 갈망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긴 영상 플랫폼인 유튜브에서는 그 욕구가 더욱 적극적으로 표출된다. 8개월 전 게시된 ‘아무것도 하기 싫은 브금’이라는 제목의 한 시간짜리 영상은 조회수 200만을 기록했다. 영상에서는 추억의 만화 <네모바지 스폰지밥>의 배경음악인 하와이안 장르의 노래들이 반복 재생된다. 잔잔한 우쿨렐레 연주가 몸과 마음을 나른하게 만든다. 댓글 창에는 “이 노래 같은 템포로만 살아가고 싶다”는 등의 반응이 잇따랐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해외에서 더 활발하다. 몇 년 전 ‘No thoughts, Head empty’라는 제목의 영상이 인기를 끌었고, 지금은 하나의 콘텐츠가 됐다. 영상의 길이가 길고 마냥 늘어지고 싶은 노래가 흘러나온다는 부분이 상통한다.

안 그래도 열심히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멍때리기에도 온 정성을 다한다. 대전문화재단이 지난 21일 개최한 ‘멍때리기 대회’에 전국에서 몰린 400명이 6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참여했다고 한다. 우리는 왜 그렇게까지 멍때리고 싶어 할까? 최근 라디오 프로그램 <KBS 열린토론>에서는 멍때리기 결핍 현상을 진단했다. 진단 결과는 ‘노동시간 연장에 따른 번아웃’이다, 현대 사회는 우리의 ‘쉼’을 잘 허용하지 않는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갓생’ 열풍이 부는 것처럼, 성과를 내는 능률적인 삶을 지향한다.

‘멍때린다’는 말의 유래가 명확하진 않지만, 대체로 부정적인 어조로 사용돼왔다. 이제는 상황이 뒤집혔다. 돈과 시간을 들여 멍을 때리려는 시대다. 멍때리기가 자연스러운 쉼의 형태는 아닐 수 있지만, 바쁜 삶에 쉼표 하나 찍을 수 있다면 반대할 이유도 없다. 멍때리기는 뇌과학자들이 권장하는 건강행위이기도 하니 죄책감 없이 즐겼으면 좋겠다.

토론을 마치며 진행자가 남긴 마지막 멘트에 뜨끔한 이들이 그리 많지 않길 바란다. “마비되시기 전에 스스로 먼저 비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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