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ㆍ공간ㆍ제주 / 김주일 외 35명/ 제주특별자치도 / 2022

제주 BOOK카페 <32>

내게 ‘시간ㆍ공간ㆍ제주’는 거로에서 별도봉까지 가는 길이다. 거로는 제주시 화북2동에 있는 마을이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마을 몇 군데에 듬돌이 있었다. 제주에서 듬돌은 힘 대결을 할 때 쓰는 큰 돌이다. 아마도 갈등이 있을 때 이 듬돌을 들 수 있는 자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하지 않았을까. 싸우는 것에 비하면 무척 평화적이다. 전쟁 대신 올림픽을 하면서 나라 간의 갈등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것처럼 말이다. 

멀쩡한 길을 놔두고 별도천(화북천)을 선택했다. 내창을 타고 가는 길이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내창이 터져 또래 아이가 목숨을 잃은 적도 있으나 내창을 선호했다. 화북천은 제주도의 여느 건천에 비해 물이 많은 편이다. 물웅덩이들은 제각각의 이름이 있다. 수도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곳에서 빨래를 했다고 들었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원남수(원남소)에서 맨들락 벗고 헤엄을 쳤다.

별도천은 민물고기가 꽤 잘 잡히는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작지만 제주도에서는 드물게 민물고기들이 보인다. 별도천을 따라 가면 원명사가 나온다. 내가 처음 다닌 곳이 원명유치원이다. 그곳에서 손오공처럼 뛰어다니다 수계를 받았다. 일본 진지동굴은 놀이터였다. 지금은 붕괴 위험이 있어서 막혔다. 별도봉은 소풍 때 자주 가는 곳이라서 길을 잘 알고 있었다. 산에서 뛰놀다 무리에서 떨어진 나는 산지등대가 보이는 언덕에 주저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열세 살 무렵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섬에 살고 있다는 걸 인식했다.

별도봉은 4ㆍ3 때 봉화가 처음 오른 곳이고, 바닷가 쪽으로 내려가면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이 있다. 나는 이 마을의 존재를 서른 살 넘어서야 알았다. 여름방학이면 아이들과 함께 놀던 화북 바다와 별도봉 사이에 있는데 몰랐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접하게 되었다. 그곳을 거닐다 아이들이 뛰노는 환상을 보았다. 그 환상을 바탕으로 시를 썼는데, 그 시 ‘곤을동’이 4ㆍ3평화문학상 시 부문에 선정되었다.

이 책은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원도심에 대한 건축가들의 글 모음집이다. 건축가들의 눈에 비친 매력 있는 제주 도심 장소 찾기가 흥미롭다. 이 책에 이런 문장이 있다. “오래된 것에는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 맞는 말이다. 제주의 시간과 공간에는 상처가 서려 있다. 그 상처를 기억하며 걷는 길이면 좋겠다. 이야기 없는 길이 없다. 모든 길은 이야기 따라 드리워졌기 때문이다. 이 책의 지도판이 나오면 좋겠다. 이 책을 읽고, 그 길을 찾아 걸어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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