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22살 오모씨 7년 수감
출장 재판서 명예회복

22살의 청년에게 제주4ㆍ3은 잔인한 봄이었다. 한 청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렸고, 고향마저 등지게 만들었다.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초등학교 교사였던 오모씨는 22살이던 1949년 제주4ㆍ3을 겪었다.

4ㆍ3의 광풍으로 1948년 11월 17일 제주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군경 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을 불태웠고,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초토화작전을 이듬해 3월까지 전개했다.

교사였던 오씨는 토벌대의 강경 진압으로 주민들이 총살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집이 불타면서 산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중 군인에게 붙잡혔다. 경찰에 넘겨진 오씨는 기절할 때까지 매 타작을 당했다. 1949년 7월 육군 고등군법회의(군사재판)는 그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오씨는 임시 수용소인 제주주정공장 창고에 갇혔다가 약 300명의 제주 청년과 함께 화물선에 실려 육지로 끌려갔다. 오씨는 대구형무소에 이어 부산형무소로 이감됐으며, 부산에서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수용실에 있던 사람들은 교도관이 부르면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전쟁 통에서도 형무소에서 살아남았던 오씨는 징역 7년6월로 감형을 받았다. 1956년 2월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그는 두 번 다시 고향 제주 땅을 밟지 않았다.

2월 6일 부산 동아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모의 법정. 백발이 성성한 오모씨(97)가 가족들의 부축을 받고 법정에 들어섰다. 1시간 동안 진행된 재심 재판에서 재판장은 “피고인은 무죄”라고 선고했다. 오씨는 “죄 없는 사람을 잡아가서 죽였던 비극적인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며 무죄 선고를 받자 짧은 소감을 밝혔다.

출소 뒤 한 번도 제주에 가보지 않았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부산에서 재심 재판을 받기를 희망한 오씨의 요청으로 법원은 법원조직법에 따라 오씨의 거주지와 가까운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모의 법정에서 출장 재판을 진행했다.

앞서 광주고검 산하 제주4ㆍ3사건직권재심합동수행단(단장 강종헌)은 수형인 명부를 확인하던 중 4ㆍ3생존 희생자 명단에 오르지 않은 오씨를 발견했다. 국가 보상금(9000만원) 외에 구금 일수에 따라 형사보상금이 지급되지만, 오씨와 그 가족들은 4ㆍ3희생자 신고를 하지 않았다.

오씨는 4ㆍ3당시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원의 활동을 도왔다는 혐의(국방경비법 위반)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후 다시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다. 고향마저 경북 군위로 바꿔버렸고, 부산에 터를 잡고 슬하에 1남 2녀를 낳았지만 자녀들에게 4ㆍ3당시 겪었던 고초를 숨겨왔다.

오씨는 국방경비법을 위반한 전과 기록으로 취직할 수도 없었고, 세 자녀가 연좌제 피해를 당할까봐 하소연도 하지 않은 채 숨죽이며 살아왔다. 고향 제주에서 교사를 역임했던 오씨는 글쓰기 등을 통해 생계를 꾸렸다. 오씨는 최근까지도 재심 재판을 거부해왔다. 이미 제주를 잊고 살고 있는데, 당시의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다.

재판장인 강건 부장판사는 “재심 기록을 보면 피고인의 운명은 기구한 것 같다. 무죄 판결이 아픔을 겪은 피고인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오씨는 “눈도 잘 안보여서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가 불편한 상황인데, 좋은 판결을 내려 주셔서 감사하다. 제가 나이는 많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사회에 이바지하며 살아가겠다”며 75년 만에 명예회복을 한 소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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