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철, 정조 시해 사건 연루돼 27년 간 귀양살이
의녀 홍윤애, 모진 고문 속 절개 지키다 순절
조정철 제주목사로 부임 후 묘비에 애도시 남겨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에 있는 홍윤애 봉분과 애월읍에서 2016년 설치한 추모비.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에 있는 홍윤애 봉분과 애월읍에서 2016년 설치한 추모비.

조선 후기 문인 조정철(1751~1831)은 정조 시해 모의 사건에 연루돼 제주에 귀양살이를 왔다.

조정철의 증조부는 노론 사대신(老論 四大臣)의 한 명이었던 조태채였다. 그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격화된 신임사화로 진도로 유배를 간 후 죽임을 당했다. 조정철의 아버지 조영순 역시 탕평책을 언급했다는 죄로 1754년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된다.

유배도 대물림이 됐는지 조정철은 1777년부터 27년 간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객 중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제주에서 보냈다.

홍의녀로 알려진 홍윤애는 조선 영ㆍ정조 때 제주목(濟州牧)에 살던 여인으로, 일명 홍랑(洪娘)이라고 불렸다.

제주에 유배를 오자마자, 아내가 자결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한 조정철은 제주 여인 홍윤애와의 만남을 통해 위안을 얻게 된다. 홍윤애는 조정철의 의복과 식사 수발을 도왔던 여인이다.

홍윤애는 섬에서 구하기 어렵고 귀한 문방사우를 상인에게 몰래 부탁해 구한 후 조정철에게 건네주었다. 

홍윤애는 대역죄인인 그에게 기꺼이 사랑을 바쳤고, 그와 정식으로 혼인하지는 않았지만 딸을 낳았다.

노론의 조정철 집안과 할아버지 때부터 원수지간이었던 소론의 김시구가 1781년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이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달았다.

김시구는 조정철을 모함해 죽이려고 딸을 낳은 지 백일도 안 된 홍윤애를 잡아 들여 거짓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모진 고문을 했다.

그러나 홍윤애는 ‘공의 목숨은 나의 죽음에 있다’며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고 형틀에 매달리는 고문을 당한 끝에 순절했다.

홍윤애 고문치사 사건은 조정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김시구 목사는 4개월 만에 파직 당해 의금부로 압송됐다. 당시 제주판관 황인채와 대정현감 나윤록도 벼슬이 갈렸다.

정조는 수령을 잘못 추천한 죄로 이조참판 김하재를 파직했고, 홍윤애와 연관이 없었던 정의현감까지 갈아 치웠다.

조선 왕조를 통틀어 3읍 수령과 제주판관까지 교체된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1805년(순조 5년) 사면 복권된 조정철은 유배에서 풀려났고, 1811년에는 제주목사를 자청해 부임했다. 스물다섯에는 유배인으로 왔지만, 환갑이 되서는 최고 통치권자가 돼서 제주에 돌아왔다.

제주를 떠난 지 8년 만이고, 해배된 지는 4년 만이었다. 그는 1812년 동래 부사로 부임할 때까지 1년 동안 제주에 살면서 홍윤애의 혼을 위로했다.

그는 부임 즉시 자신을 위해 희생한 홍윤애의 혼을 달래고자 무덤을 찾아 ‘홍의녀묘’라는 비를 세우고, 애도시를 새겨 넣었다.

비문에 ‘옥 같던 그대 얼굴 묻힌 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혼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으리…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이 이어졌네’라는 시를 남겼다.

홍윤애 묘는 원래 삼도1동 전농로 공동묘지에 있다가 1937년 제주 농업학교가 들어서면서 외손자인 박규팔의 무덤이 있는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로 이장됐다.

모진 고통 속에서도 숨이 다 할 때까지 임을 위해 지킨 지조와 절개, 그리고 희생적인 사랑은 시대를 넘어서 잔잔한 감동을 준다.

제주시는 목숨으로 사랑을 지켜 낸 홍윤애가 묻혔던 전농로에서 오는 3월 22일부터 24일까지 제17회 전농로 왕벚꽃 축제를 개최했다. 이번 축제는 ‘사랑 벚꽃 가득한 전농로의 봄날’을 주제로 열렸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전해지는 조정철의 묘는 충주시 인근에 있다. 조씨문종회는 홍윤애를 족보에 등재하고 정식 부인으로 맞이하는 의식을 치렀다.

조정철은 제주목사로 있는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동서외곽을 개축해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고, 12개 과원을 설치해 감귤 재배를 권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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