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다. ‘모든 사람은 선한 의지가 있다는 것이 나의 정치철학이요 신념’이라는 어느 정치인의 말처럼 이제는 국민통합을 생각해야 할 때가 된 듯하다. 하지만 겨우내 타오른 광장의 촛불혁명이 ‘차가운 분노’를 땔감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촛불과 태극기로 나뉜 듯하지만, 어느 쪽도 더 이상 직업정치인과 그들이 독점하는 정치를 믿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이들은 광화문으로, 시청 앞으로 광장을 찾아 직접 나서는 것이지 돈이나 가짜 뉴스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데도 탄핵의 국면에 광장에 이끌려 다니고 있는 직업정치인들을 보면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직무정지 중인 대통령이 읽고 있다는 책은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의 ‘제4차 산업혁명(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이란다. 대통령은 지난 1월 모 인터넷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창조경제, 문화융성을 통해 4차 산업혁명이 이뤄질 수 있는 기반을 다져왔다”면서 ‘창조경제’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이런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야당 정치인들도 “차기 정부에서 대통령 직속 4차 산업혁명위원회를 만들어 벤처기업과 창업 생태계 활성화를 이뤄내겠다.”고 장밋빛 비전을 제시하는가 하면,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해 교육을 혁명적으로 바꾸겠다.”고 호언장담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불쑥불쑥 ‘제4차 산업혁명’의 열풍이 타오르는 것은 클라우스 슈밥이 지난 해 10월 국회를 찾아 ‘4차 산업혁명과 대한민국’이라는 특별대담을 한 이후부터다. 이 열풍은 탄핵 국면의 시스템 개선 요구와 맞물리면서 더욱 더 강하게 불고 있다.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교육시스템까지 거론되자 대학들이 다투어 편승하고 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4차까지 왔지만 학교교육은 여전히 나폴레옹시대의 틀 그대로’라는 문제인식이나, 기존의 교육시스템 관행에 얽매이지 않은 실험적인 제도의 구축과 ‘4차 산업혁명 인재 육성’이라는 명분은 그럴 듯 보이지만, 혁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차별성을 찾기는 어렵다.

토인비는 산업혁명을 ‘어느 순간 갑자기 이루어지는 격변적이고 격렬한 현상이 아니라,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기술혁신’이라고 말했다. 물론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이 ‘제3차 산업혁명’을 저술한 2011년 이래 이러한 기술혁신이 급격히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학은 백년을 내다본다는 무거운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대학은 상품을 찍어내는 산업체가 아니라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이지만, 이 시대가 요구한다는 통섭과 융합이 가능한 유연성을 확보한 인재라고 하는 것이 분과학문으로 나누어진 근대 이전의 대학, 곧 ‘교수들과 학자들의 공동체(universitas magistrorum et scholarium)’가 추구했던 바로 그 인재와 다르지 않다는 점만큼은 잊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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