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에 경북 안동 도산면 토계마을에 소재한 도산서원을 찾은 적이 있다. 도산서원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며 문신인 퇴계 이황선생이 후진을 양성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했던 곳으로 향사한 서원이다. 그 곳에는 1000여종의 장서가 소장되어 있고 퇴계선생이 쓰셨던 유품들도 많이 진열되어 있다. 특히 진열된 유품 가운데 명아주(명아주과에 속하는 일년생 잡초) 줄기로 만들어진 지팡이가 놓여 있었다.

 퇴계선생의 명아주 지팡이

 지팡이는 ‘걸음이 불편할 때 땅에 짚고 다니는 막대’라고 한다면 그것은 견고하고 내구력도 있고 또한 모양새도 좋은 것이 알맞을 것이다. 그런데 왜 퇴계선생은 이러한 것을 마다하고 명아주 줄기를 이용하여 지팡이로 쓰셨을까 하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퇴계선생을 더욱 흠모케 하고 끌리게 했다.
 명아주는 초본(草本)식물이다. 쓰임새로 분류하면 들에 흔한 쓸모없는 잡초에 속한다. 줄기가 1.5m까지 자라고 줄기 굵기도 직경 3㎝에 이르러 초본식물치고는 꽤 크다. 또한 줄기는 울퉁불퉁하여 매끄럽지 못하고 색택도 예쁜 편은 아니다.
 초본식물은 목본(木本)식물에 비하면 연약하다는 것이 일반적 특징이다. 명아주 줄기도 나무막대에 비하면 연약하다. 다시 말해서 명아주 줄기는 굵고 거칠어서 얼핏 질기고 강할 것 같지만 실은 보기와는 달리 약간 여린 편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종아리 한대쯤 맞아도 아프다는 느낌이 생각보다 적다는 말이 된다.
 어느 옛 큰스님은 자신의 손에 쥔 지팡이 곧 ‘주장자’를 땅에 몇 번 짚는 것은 현상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상징적 행위라고 한다. 또한 후진사회에서 ‘지팡이를 짚었다’는 것은 어느 한곳에 크게 발전할 기초를 얻었다는 말로 대신하기도 한다.

 참스승의 깊은 사랑

퇴계 이황선생은 생애의 대부분을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다닌 것으로 안다. 그것은 걸음이 불편해서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법의 상징으로 여겼음도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러나 퇴계선생이 쓰신 지팡이는 후진들을 바르게 인도하고, 깨우치는데 사용목적이 있는 소위 편달이었음이 분명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지팡이는 엄격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내면에 참스승의 깊은 사랑이 잠재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퇴계선생은 단양팔경을 두루 노래하면서도 이 지팡이를 짚었을 것이다. 깊은 사색이나 사화(士禍)의 부침이 있었을 때도 이 지팡이를 짚고 난국을 헤쳐 나갔을 것이다.
 퇴계선생은 출생 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숙부 밑에서 열심히 학문을 익혀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관직 말년쯤에 양관대제학(홍문관, 예문관의 으뜸)벼슬에 이르기도 했다. 그는 2000수가 넘는 시를 세상에 남겼다.
 그의 사상의 핵심인 경(敬)을 바탕으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에 서로 조화로운 덕목을 세상에 남겼다. 높은 학덕과 공명정대한 관직생활은 뭇 백성에 귀감이 되었고 여러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조선 13대왕 명종은 그를 아끼고 존경하여 생의 거소인 도산경치를 한 화공에게 그리도록 하여 병풍을 만들어 항상 둘러보았다고도 한다.

 440년전 동방의 참스승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퇴계선생은 시대가 아닌 동방이 낳은 선비이자 참스승이었다. “분에 안 맞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학문하려 하니 나이 이미 늙었구나”하는 그 분의 시가 떠오른다. 나는 440년이 지난 지금 퇴계선생께서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이 시를 읊조리는 모습을 조용히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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