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주는 위로 <12> 아라 캠퍼스의 터전, 아라동

죽성마을 표지석.

◇ 오름 아래, 오등동(梧登洞)

오등동은 오라2동의 서쪽, 제주국제공항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한라산 백록담에서 탐라 계곡을 거쳐 흘러가는 한천(漢川)이 갖가지 기암절경을 연출한 풍광을 자랑한다. 영주 10경 중 영구춘화(瀛丘春花)로도 불리는 방선문계곡(訪仙門溪谷)으로 유명하다. 방선문은 이 계곡 중간 지점에 있는 큰 바위인데, 신선이 방문할 정도로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계곡 입구라는 뜻이다. 영구춘화(瀛丘春花)는 방선문계곡의 봄 풍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골짜기 주변에 핀 꽃들이 계곡물에 비쳐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곳에서 조선시대 선비들이 꽃놀이와 시서예를 즐겼다고 한다. 순조 23년 한응호(韓應浩) 목사가 남학당(南學堂)을 건립하여 주민을 교육한 것으로 유명하다. 농가가 90%, 비농가가 10%인 농촌마을이다.

오등동은 ‘오드싱’과 ‘다시’ 마을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오드싱 마을은 『제주읍지』에서는 오등생리(吾登生里)라고 표기되었다. 오드싱이라고 불렸던 것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오등’이 된 것이다. 『삼군호구간총책』에는 오등(梧登)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마을은 『탐라순력도』에서 ‘간다시(艮多時)’라고 표기되었다. ‘다시’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등동의 또 다른 마을인 죽성(竹盛)은 대나무가 많은 데서 유래된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4ㆍ3이전만 해도 76호가 살았던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었다. 당시 제주읍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있었던 마을로, 지금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나 일부 올레와 대나무 등과 같은 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다.

◇ 한라산의 밑벌판, 월평동(月坪洞)

월평동은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다. 제주시에서 국도 11호선을 타고 올라가다 16호선인 중산간도로에서 동쪽으로 위치해 있다. 서쪽으로는 영평동, 동쪽으로는 용강동을 경계로 하고 있다. 높고 낮은 능선으로 감싸 있는 중간지점에 위치한 약 6만평에 이르는 분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병뒤왓’이라고 부르는 곳은 곡창지대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과수원으로 바뀌었다. 동쪽 물장오리에 서면 어승생악까지 한라산 전체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신제주와 도두봉, 그리고 공항이 보인다. 북쪽으로는 시내, 사라봉과 별도봉이, 동북쪽으로는 삼양과 원당봉, 조천읍까지 보인다. 망망대해의 수평선이 조망되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농가가 100%이다.

월평동의 옛 이름은 ‘다라쿳’인데, ‘다라’는 ‘높다’라는 뜻을 가진 고구려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은 곳에 있는 숲’ 또는 ‘높은 곳에 있는 덤불’이라는 뜻이다. 한라산의 ‘밑 벌판’이므로, 다랏곳, 다랏굿, 월하, 월평이라고 불렸다. 17세기 고지도에서 별라화촌(別羅花村)이라고 표기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초기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본다. 『탐라순력도』에서는 ‘별라화(別羅花)’, 『탐라지도』에서는 ‘별라화리(別羅花里)’라고 표기되었다. 다라쿳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삼군호구가간총책』에는 월평(月坪)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래 제주군 중면 지역으로 월평이라고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월평리라고 하여 제주면에 편입되었다. 1955년 제주시에 편입되어 월평동이 되고, 1962년에 아라동 관할이 되었다.

◇ 물가의 가시나무 마을, 영평동(寧坪洞)

영평동은 서쪽으로는 아라2동, 동쪽으로는 월평동, 북쪽으로는 황사평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감귤, 딸기 등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기후가 대체로 온화하여 농사가 잘 되기 때문이다. 마을을 흘러가는 하천의 경관이 수려하고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등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한라산에서 발원한 부록천이 마을을 남북 방향으로 가로질러 흘러, 북쪽의 화북 2동 거로마을 근처에서 화북천과 합류한다.  농가 95.2%, 비농가가 4.8%이다. 영평상동과 영평하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평상동은 ‘가시나물’이라고 했는데, 가시나무를 뜻하는 ‘가시남’과 ‘물[水]’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한다. 가시남은 가래나뭇과의 돌가시나무, 북가시나무, 종가시나무, 참가시나무 따위를 가리키는 제주어이다. 갓남(南), 갓목(木)으로 표기하다가, 조선 후기부터는 가시동(加時洞)으로 표기하였는데, 이 때부터 행정 구역상 영평리에 포함되었다. 영평의 웃동네에 해당하기 때문에 영평상동이라고 표기했는데, 1950년대부터 행정상 아라동에 포함되었다. 영평하동은 ‘알무드내’라고 했는데, 무드내[無等川] 아래쪽에 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17세기 고지도에서는 ‘무등천촌(無等川村)’이라고 표기하였는데, 한자로는 하무등천촌(下無等川村) 또는 하무등천리(下無等川里)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부터는 ‘하무리(下無里)’라고 했는데, 영평리에 포함되면서 영평하동이라고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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