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그의 그림자 준석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내게 우산을 내민다. 어색한 그녀의 미소를 눈에 담으며 그녀의 곁에 섰다. 나는 너무도 익숙하게 그녀의 향기를 맡고, 우산을 쥔 그녀의 가는 손가락에 시선을 둔다. 굳이 알고 있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에게서조차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준석이 사랑했다는 초상화 속 여인을 나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핏기 없는 얼굴에는 상처가 가득했지만, 커다란 눈망울만은 그 때 본 그대로였다. 준석은 아마 마지막이 되어버린 그녀와의 짧은 시간 속에서도 그녀의 초췌한 얼굴을 만져주지 못하고 메마른 손을 잡아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애써 더듬거리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을 테고, 이내 어색하게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준석이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을 알고 있을까. 준석의 가슴에 자신의 얼굴이 너무도 깊게 새겨져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을까. 순간, 현기증이 일어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혜민은 어떤 것도 읽어낼 수 없는 건조한 눈길로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둠에 묻힌 도로 위로 가는 빗줄기가 쉼없이 곤두박질 친다. 라디오에서는 이별의 아픔 혹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애절한 발라드가 몇 분째 이어지고 있다. 괜히 오늘 하루가 청승맞다는 생각이 든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앞뒤가 뻔한, 그러나 적절한 타이밍에 눈물샘을 자극하는 멜로 영화를 보고 극장문을 나서는 기분이다. 나는 이기적이다. 관계의 시발점에서 생겨나는 환상이나 기대 따위를 믿지 않을 뿐더러, 내 멋대로 앞서가지 않는다. 그런데 불현듯, 준석과 나의 그림자가 닮았다는, 선배의 말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내 발은 어느 새 가속 폐달을 향하고 있다. -이제, 내게 그는 없다. 치켜든 손등으로 와닿는 햇살의 감촉이 아직은 봄이다. 얼마동안 잠이 들었던 걸까. 몸이 녹아내릴 듯 가볍다. 두 달 여간 이어졌던 불면증도 이제 내 몸을 떠나려나 보다. 오랜만에 느끼는 휴일 오후의 단조로움, 낯설지만 싫지 않다. 침대 아래 내팽겨진 휴대폰을 집어들어 전원을 켰다.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 알림음이 연거푸 울려댄다. 친구들은 한결같이 걱정과 위안의 말들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내게 필요한 말들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들에겐 최선이었을 거라 여기며 메시지 삭제 버튼을 눌렀다. “..꿈에서 준석일 봤어요... 이 얘길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당신과 나 사이엔 늘 그 녀석이 있네요. 그래요, 당신과 내가 우리가 될 순 없겠죠. 당신은 내게서, 나는 당신에게서 그 녀석을 보게 될테니까요... 확실한 건 당신과 내가 준석이라는 기억을 안고 있다는 거죠. 물론 외면할 순 없겠지만, 그 기억들이 당신에게 상처가 될 수는 없을 거예요.. 이미 알고 있을테지만..." 민혁은 나, 동시에 그의 것이기도 한 이야기들을 낮게 뱉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그냥, 자연스레 하게 되는 이야기 같아 나 역시 무던히 들을 수 있었다. 서랍 안에 두었던 준석의 일기장을 꺼냈다. 이제 그의 일기장이 내게 있다는 사실은 어색하고 거추장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수납장에서 한참만에 찾은 라이터를 일기장에 갖다댔다. 분홍색 겉표지가 이내 까맣게 타들어가더니 뿌연 연기가 일었다. 어딘가 내 눈물자국이 묻어있을 그의 일기장은, 그녀를 사랑했던 그와 함께 사라지고 없다. 삽화/ 고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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