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주는 위로 <13·끝> 한라산의 관문, 아라동의 마을들

산천단마을에서 내려다본 제주대학교 후문

◇ 아라 1동의 자연 부락

행정동 아라동의 중심마을로 손꼽히는 아라1동에는 아라호를 비롯 세미양마을, 인다라, 장구왓마을, 구오름마을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아라호는 옛 문서에 아라호촌(我羅豪村, 我羅好村), 아라호리(我羅好里) 등으로 표기되었는데, 19세기 중후반에 아라리(我羅里)로 표기되었다. 민간에서는 주로 ‘아라위’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 때 아란동(阿蘭洞)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그래서 최근 아파트단지와 함께 형성된 상가의 이름에 ‘아란’이라는 표시가 심심치 않게 들어가기도 한다.

세미양마을은 삼의오름(삼의악) 또는 새미오름이라고도 불리는 세미양오름 일대에 형성되었던 마을이다. 세미양오름은 정상부근에 있는 샘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자로 표기하면서 삼의양촌(三義讓村, 三義陽村 등), 삼매양촌(三梅陽村) 등이 되었다. 산천단마을은 산천단이 위치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로명 주소로는 제주대학교 후문 쪽을 산천단동길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의료원 쪽을 산천단남길로 표기하고 있다.

인다라마을은 인다라촌(仁多羅村), 인다동(仁多洞), 인월동(仁月洞) 등으로 표기되었다. 『해동지도』의 「제주삼현도」 신지도(18세기 초)에는 인물라촌(仁勿羅村)으로 표기되어 있고, 「탐라지도병서」(1709)에는 인다라촌(仁多羅村)으로 표기되어 있다. 인물라촌은 인다라촌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이는데, 인월동은 인다라마을의 ‘다라’를 ‘달’로 보고 한자로 바꾼 것이다. 장구왓마을은 아연로 부근에 위치한 장구왓 일대의 마을로, 장구동(長久洞)으로 표기했다. 오등동에도 한자표기가 다르지만 장구왓이 있다. 구오름마을은 구오름 일대에 형성되었던 마을로, 17세기 고지도에서는 구호음촌(求好音村)으로 표기했다. 오늘날에는 구산동(龜山洞)이라고 부른다.

◇ 아라 2동의 자연 부락

아라2동의 자연 부락으로는 걸마을, 간드락, 배리왓, 구릉밧 등이 있다. 걸마을은 걸마로촌(乞馬老村), 거마로촌(巨馬路村, 巨馬老村) 등으로 표기하다가 19세기 말에는 영남리(寧南里)라고 표기했다. 일제강점기에 거마동(巨馬洞)으로 표기했다. 오늘날에는 ‘걸머리’라고 부르는데, 금산물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금천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간드락마을은 간월동(看月洞), 간월리(看月里) 등으로 표기해서 최근에는 ‘달이 뜨는 마을’로 홍보하기도 한다. 베리왓동네는 연전동(硯田洞)으로 표기하는데, 베리가 벼루의 제주 방언이기 때문이다. 구릉밧동네는 벌대동(伐大洞)으로 표기해왔고, 원두왓으로 불렸던 월두마을에는 제주대학교 교수아파트인 프로빌이 있다.

◇ 문화가 주는 위로, 마을이 주는 위로

오등동에는 간다시마을, 죽성마을, 믠밧동네가, 영평동에는 알무드내와 가시나물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지난 해 11월 제주대학교가 위치한 아라동 마을들을 알아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한라산의 관문, 아라동의 마을들>이 이제 끝났다. <문화가 주는 위로>는 문화행사를 찾아 취재하는 기획기사였다. 담당기자가 개인사정으로 2회만에 취재를 그만두면서, 2016년 2학기부터 떠안게 되었다. 그동안 아홉 개의 꼭지를 열 네 번의 지면에 나누어 실었다. 주간교수의 보임을 놓게 되었으니, 이제 이 지면과도 이별을 고해야 할 때다. 제주대학교가 위치한 마을로 이별을 고하게 되어 다행이다.

문화란 본디 사람들이 살아간 흔적들이다. 사람들은 마을을 이루고, 마을에서 산다. 개인이 더 중요한 시대이니만큼 마을이 주는 위로를 다시 한 번 경험해 볼 수 있는 날들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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