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 깬 ‘4ㆍ3대자보’, 공론화 확산 계기 마련…
학생 징계철회와 시험거부 이어 대중투쟁으로 확산

윤철수 언론학 박사 헤드라인제주 대표이사

국가 공권력에 의해 수많은 무고한 양민이 희생된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4ㆍ3이 어느 덧 70주년을 맞았다. 반세기 넘게 침묵을 강요받으며 살아야 했던 질곡의 세월, 그리고 금기가 깨지고 터져 나온 4ㆍ3 외침, 들

불처럼 타오른 진상규명 투쟁, 피맺힌 눈물과 투쟁으로 일궈낸 제주4ㆍ3특별법 제정, 그리고 4ㆍ3진상조사보고서 발간과 대통령의 공식 사과, 국가기념일 지정 등 제주4ㆍ3 70년은 곧 대한민국의 역사였다.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는 상황이지만, 지난 4ㆍ3운동의 성과는 실로 값진 것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4ㆍ3 70주년을 맞아 대학가의 4ㆍ3운동사(史)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사실 4ㆍ3 진상규명 운동의 역사에 있어 대학가 부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4ㆍ3이란 단어를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암울한 시대에 진상규명 요구가 처음 터져 나온 곳이 제주지역 대학가였고, 진상규명 운동의 대중화를 촉발시킨 주역도 바로 대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제주4ㆍ3 관련 각종 사료에서는 제주지역 대학가 부분이 ‘야사(野史)’에 가깝게 다뤄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근에 발간되는 백서 등을 통해 대학가 운동의 역사적 의미는 재평가되고 있다.

제주대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된 대학가 4ㆍ3 운동은 △초기 단계인 제1시기(1980년 초반-1988년) △4ㆍ3 진상규명 투쟁이 본격화된 제2시기(1989-1992년) △4ㆍ3 진상규명 운동의 대중화와 제주4ㆍ3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제3시기(1993-1999년)로 구분해 살펴볼 수 있다.

제1시기는 제주4ㆍ3의 ‘금기’가 깨짐과 동시에 공론화가 시작된 시기였다. 1980년대 초반부터 학생운동권 진영에서는 4ㆍ3 관련 자료들을 은밀히 복사해 읽으면서 내부 토론이 진행했던 것으로 전해지고는 있으나, 당시 학내에는 공안기관이 상주하며 삼엄한 감시가 이뤄지던 상황이어서 4ㆍ3을 이슈화 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4ㆍ3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1986년 4월이었다.

그해 4월 3일 아침, 제주대학교 본관과 나란히 인접한 당시 학생회관 1층 로비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제주에서 처음으로 공개적 4ㆍ3 분향소가 대학 내에 설치된 것이다. 총학생회의 기습적인 분향소 설치에 깜짝 놀란 대학 교직원들이 몰려나와 분향소 철거를 요구했고, 학생들은 강제철거 저지에 나서면서 1시간 넘게 충돌과 대치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오전 11시쯤, 학생회측이 분향소를 3층 총학생회 내부(현 제주대신문 공간)로 옮기면서 상황은 일단락됐다. 이날 일은 제주4ㆍ3 문제를 공개된 장(場)으로 끌어내며 논의의 물꼬를 트는 첫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이 때부터 ‘4ㆍ3’은 더 이상 금지된 단어가 아니었다. 이듬해인 1987년, 총학생회는 4ㆍ3을 첫 이슈로 등장시키며 4월 3일 ‘제39주기 4ㆍ3사건 위령제’를 개최했다. 이 위령제는 학내는 물론 제주도 전체적으로도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해 위령제보다도 더 큰 이슈가 됐던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4월3일 아침, 본관 학생회관 건물 외벽을 비롯해 교내 곳곳에 붙여진 ‘4ㆍ3 대자보’가 그것이었다. 총학생회와 여학생회, 사회과학대 학생회, 인문대 학생회 명의의 이 대자보는 ‘한라산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으로 시작하여,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을 서술하며 4ㆍ3을 민중항쟁으로 규정하고, 나아가 수많은 양민이 무고하게 희생된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대자보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얼마 없어 모두 떼어져 사라졌다. 공안당국의 대응은 시간이 한참 흐른 ‘4ㆍ13 호헌조치’ 직후에 나타났다. 4월 15일, 경찰은 송영란 총여학생회장과 사회대학생회 학생회 간부를 전격 연행했다. 이것이 대학가 4ㆍ3 진상규명의 시발점이었던 이른바 ‘4ㆍ3 대자보 사건’이다.

경찰이 이들 학생을 연행한 것은 4ㆍ3의 금기를 깼다는 응징인 동시에 4ㆍ3이 공론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 그리고 4ㆍ13 호헌 조치에 따라 학생회 조직을 위축시킴으로써 대학가 시위를 차단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안당국의 이 계산은 빗나갔다. 강제연행으로 인해 오히려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사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연행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이 속속 집결하여 대학당국과 경찰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다음날인 4월 16일 오후 1시, 학생회관 앞에서 열린 ‘4ㆍ19 민주혁명 계승대회’에 참가한 200여 명의 학생들은 본관 앞으로 몰려가 “연행 학생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4월 17일 오후 1시에는 1000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제1차 비상학생총회가 열려 ‘중간시험 거부’가 결의됐다. 학내 시위가 확산될 움직임을 보이자, 경찰은 이틀 만에 연행 학생 2명을 모두 석방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연행 학생이 석방된 다음날인 4월 18일은 토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후 2시 열린 제2차 비상학생총회에도 1000여 명이 참가한 것을 비롯해, 4월 20일에는 3천여명의 학생들이 중간시험을 거부하고 교내 시위를 벌였고, 총장실 점거 농성도 시작됐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자 대학당국은 징계 철회와 시험거부에 따른 사후 대책을 제시하면서 10일간 이어지던 학내 사태는 수습국면에 접어들었다.

‘4ㆍ3 대자보 사건’은 대중적 4ㆍ3 운동의 발판을 마련하는 의미 있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6월 민주항쟁을 거치면서 4ㆍ3은 단순한 위령의 차원을 넘어 진상규명 요구로 분출되었고 대학가의 최대 이슈로 부상하였다. 이때부터 매해 4월 3일이 되면 4ㆍ3주간 선포와 함께 학내에서 위령제가 봉행되었다.

1988년에는 제주대학교 옴팡밭에 ‘4ㆍ3방사탑’이 설치되었다. 그해 4월 4일 4ㆍ3 방사탑 앞에서는 3백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제40주년 4ㆍ3위령제와 4ㆍ3진상규명 촉구 및 계승대회’가 열렸다. 학생들은 “4ㆍ3특별조사위원회를 즉각 구성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횃불 행진을 벌였다. 40주기 4ㆍ3에서는 위령제와 더불어 4ㆍ3을 단일 주제로 한 정치집회가 처음 열렸다는 점, 그리고 정부에 4ㆍ3 특별조사위원회 구성을 촉구하는 등 투쟁 방향과 요구가 구체성을 띄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제2시기인 1989년부터 대학가 4ㆍ3운동은 제주지역 4개 대학 총학생회 연대조직인 ‘제총협’ 출범과 맞물려 더욱 강력하게 전개된다. 1989년 추모 집회를 마친 학생들은 4ㆍ3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추모대행진을 하기 위해 교문 밖으로 나서 입구도로를 봉쇄하고 있던 경찰과 정면 충돌했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진압에 나서자,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을 투척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때부터 매해 4월이 되면 제주대 벚꽃 진입로는 최루연기로 가득했다.

1991년 제43주기 4ㆍ3에서는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대규모 부상자와 연행사태가 발생했다. 1천여명의 학생들이 관덕정 앞 4ㆍ3추모제에 참여하기 위해 제주대 정문을 나서자 경찰이 최루탄을 무차별적으로 쏘며 강제 해산에 나서 50여명이 연행됐고 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입었다. 제주시내에서 합법적이고 대중적 추모집회 개최 허용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지속적 투쟁은 1992년 제주시 탑동광장에서 사월제 준비위원회 차원의 첫 합법적 추모집회를 성사시키는 결실로 이어진다. 제2시기 대학가 4ㆍ3 진상규명 운동은 위령 내지 추모 차원을 넘어, 4ㆍ3에 대한 ‘관점’과 당면과제의 정리, 투쟁방향을 명확히 제시한 점이 특징이다. 4ㆍ3을 ‘민중항쟁’ 관점에서 접근하는 한편, 4ㆍ3 학살 과정에 미국의 책임을 제기했다.

제3시기 대학가 4ㆍ3운동은 ‘4ㆍ3 진상규명’을 위한 제주4ㆍ3특별법 제정을 목표로 해 대중적으로 전개되는 특징을 보인다.

1993년부터 매해 관덕정 앞 집회 및 시내 거리행진 등을 통해 진상규명을 제주사회 최대 이슈로 끌어올렸다. 또한 전국 대학을 순회하며 4ㆍ3문제 전국화를 위한 활동도 펼쳐졌다.

4ㆍ3특별법 제정 촉구 함성은 1999년에 이르러 최고조에 이른다. 1986년 첫 4ㆍ3 분향소 설치 이후 10여년간 지속적으로 전개돼 온 대학가 4ㆍ3 진상규명 운동은 1999년 12월 16일, 마침내 「제주4ㆍ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소중한 결실을 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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