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한국은 미투운동의 열풍으로 뜨겁기만 하다. 권력이라는 얄팍한 가면 뒤에 숨어 우월한 지위로 상대방을 성적(性的)으로 억압했었던 자들, 즉 예(禮)의 부재시대를 즐기며 살아오다가 미투운동 속에 치부를 드러낸 우리 사회의 일부 권력자들에게는 태풍이 몰아치는 것과 같은 상황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미투운동에 대한 방어기제로 ‘펜스룰(Pence rule)’을 적용하여 회식이나 사적인 영역에서 여성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퍼지고 있다. 이런 룰은 채용이나 업무 등 공적인 영역에서도 여성을 배제하게 된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마치 과거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을 외치던 시대로 역행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쓴웃음이 나올 정도다.

‘남녀칠세부동석’은 ‘예기(禮記)’에 나온다. ‘여섯 살 되면 숫자와 방향을 가르치고, 일곱 살 되면 남녀 자리를 같이하지 않으며, 여덟 살엔 소학에 들어간다’는 대목이다. ‘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다’에 대해서는 일곱 살이 되면 남녀가 구분이 있으니(有別) ‘한 이불에 재우지 않는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말은 교육의 필요성과 남녀에 다름이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지 차별(差別)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본질을 정성스럽게 이해하고 동참하고자 하는 노력이지, 겉으로 흉내만을 내거나 “배재”라는 극단적 방법을 취하는 천박한 소인배의 행위가 아닐 것이다.

과거 군자(君子)라 칭해지던 이들은 어떻게 하면 선(善)을 실천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이들은 바로 인간존재의 본질을 자각하고 자신의 끊임없는 수양과정을 통해 이상적인 인격을 완성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엄격함을 요구했다. 근본이 잘못되면 가치의 척도가 무너진다. 가치의 척도가 무너지면 사회도 개인도 품격이 떨어진다. 곧 인간으로서의 볼품이 없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예(禮가) 없으면 인간은 금수(禽獸)를 면할 수 없다”고 하여 인간으로서의 지켜야할 최소한의 예를 저버린 이들은 금수와 같이 취급해야 한다고 했던 주장도 있었다. 조선시대 예문(禮文)의 종장(宗長)이자 거벽(巨擘)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은 예를 인간과 금수를 구별하는 기본적인 차이라 보았다. 예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수신(修身)을 강조하고, 올바른 마음과 심성의 온전함을 지키며, 모두 예에 맞게 행동하고, 하늘을 우러러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예의 본질을 정성스러움으로 인식하고 있어서 정성이 없이 단지 흉내만 내는 것은 진정한 예가 아님으로 차라리 예를 갖추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우리 사회는 자신에게 엄격히 요구하지 않으면서 권력을 이용하여 약자에게 부당함을 요구하는 ‘소인’들로 인해 어지러워졌다. 미투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부끄러운 행위들을 반성하며 인간의 품격을 다시 바로 세워야 할 중요한 변곡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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