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27일자 1면에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관련 기사를 실으면서 “미국이 한국의 즉각 독립을 주장한 반면 소련이 38선 분할 점령을 위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했다. 이 기사는 명백한 가짜뉴스였다.

1945년 12월 16-27일 열린 모스크바 3상회의(미·영·소)에서 주요 쟁점은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을 언제 어떤 절차를 거쳐 독립시킬 것인지에 대한 거였다. 합의 내용은 첫째 임시정부 수립, 둘째 임시정부 구성 및 원조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 설치, 셋째 임정과 공위의 신탁통치안 마련 등이었다. 논란의 핵심은 신탁통치 기간이었다. 미국 안은 최소 5년 최장 10년이었고, 소련 안은 최장 5년이었다.

외국 통신사인 AP, UPI 통신의 12월 25일자 추측 보도가 오보의 발단이었다. 그 기사가 다음날 26일 국내 합동통신을 거쳐 27일자 국내 신문에 실리는 과정에서 왜곡됐다. 당일 동아일보의 기사에는 “미국의 즉시 독립, 소련의 신탁통치”를 못 박았다.
동아일보 보도를 기점으로 반탁운동이 폭발했다. 반탁을 제2의 독립운동으로 규정했던 이승만 진영은 물론이고 김구의 임시정부도 신탁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하고 12월 30일 국민 총파업을 단행했다. 대다수의 사람들도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됐다. 가장 큰 타격은,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선 박헌영 계열의 남로당이었다. 이 때 이승만을 앞세운 우파는 박헌영 등의 좌익진영에 대해 “식민통치 연장에 동의하는 세력”이라는 낙인을 찍었고, 좌익에 비해 대중의 지지가 미흡한 상황을 타개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반탁운동을 이끌었다.

이 배경에는 해방 후 우익의 세력은 좌익에 비해 작았고, 무엇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난받던 이들 다수를 포괄하고 있었다. 미군정에 협력하며 치안, 행정 등의 일에 종사하는 이들의 대다수가 친일반민족 행위자였다. 이들은 동아일보 보도 이후 우익진영의 주도 속에 반탁과 함께 즉시 독립 주장을 내세우며 신탁통치에 찬성한 세력을 좌익으로 몰고 지배층으로 급부상 했다. 이들은 ‘신탁통치는 또다른 식민통치’라며 국내의 자주·민주세력을 매도하고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의 재등장은 물론 대한민국은 ‘반공’ 프레임에 휩쓸린다.

제주4ㆍ3의 아픔에도 친일파 청산을 못했기에 더 큰 비극이 벌어졌다. 3만여명 이상의 주민학살에 나선 이들이 미군정을 등에 업은 친일파들이었다. 광복 후 대한민국 군인과 경찰로 옷을 갈아입은 친일파들이 제주사람들의 학살을 진두지휘했다. 이들은 다시 5ㆍ16 군사정변 이후 출세가도를 달려 권력의 중심부에 포진했다.

역사에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동아일보의 가짜뉴스가 없었다면 광복 이후 이념적 갈등으로 인한 대혼란을 막고, 친일파 처단과 청산이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짜 뉴스를 접할 경우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러겠는가’ 하고 믿는다. 73년 전의 동아일보의 가짜뉴스를 역사적 교훈으로 되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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