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이재룡 역, 민음사, 201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대학시절 재미있게 들은 강의 중 하나가 ‘교양국어’다. 과목명만으로는 호기심이 일지 않을 필수교양이지만, 수업해주신 선생님이 특별했다. 새내기 법학도들을 앉혀두고 낭랑한 목소리로 황지우 시를 들려주셨고, 수능문제집 지문으로나 토막토막 접했던 김승옥의 소설 전문을 읽으며 국가에 대한 각자의 입장과 무관하게 국어가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나 알게 하셨다. 단편 ‘염소는 힘이 세다’를 함께 낭독했던 1교시 수업시간, 온몸을 휘감던 전율이 지금도 생생하다.

학기말 즈음하여 선생님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서평과제를 내주셨다. ‘격동기를 관통하는 네 인물의 삶과 사랑’이라는 간략한 설명만 덧붙인 채 갓 사랑을 시작할 스무살 여러분에게 꼭 읽히고 싶어 외국작품임에도 ‘국어’수업 과제로 선정했다 하셨다.

과연 사랑할 나이에 다다른 나는 그 무렵 첫 소개팅을 했다. 동갑내기 상대방은 새벽마다 시사영어강좌 듣고, 자기계발서를 매주 한 권씩 뗀다 하였다. 세련된 여자가 이상형이라면서 나보고 자기관리를 위해 무얼 하느냐 묻길래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읽는다고 답했다. 요즘 세상에도 그런 이념서 읽는 대학생이 다 있냐고 그는 되물었다. 발끈한 나는 마르크스 대변인이라도 된 양 이해 못한 혁명적 사상을 엉터리로 읊었다. ‘안 세련된 여자’를 향한 그의 눈빛은 이내 ‘시대착오적 부류’를 향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너 같은 부류 나도 별로거든?’ 생각하며 그 눈길을 똑바로 받아내었지만, 막상 그가 내 번호를 안 묻고 정류장까지 바래다주지도 않자 마음이 상했다. 그렇게 ‘첫 만남에서 까이고’ 귀가하여 서평을 밤새 마무리 지었다. 마지막 구절에는 이렇게 적었다: “그 모든 해석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감할 수 없었다. 솔직히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은 바람둥이(토마시)와 마조히스트(테레자), 그리고 변덕쟁이(사비나)와 우둔한 자(프란츠)의 이야기다.”

오래전 일인데 단어 하나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선생님이 한참 웃으시더니 내 과제를 급우들 앞에서 읽어주셨기 때문이다. 긴 설명도 덧붙이셨는데, 다른 건 가물하고 다만 토마시와 사비나가 가벼움을 표상하는 반면 테레자와 프란츠는 무거움을 대변한다던 말씀은 기억난다. 작품 안에서 가벼운 인물이 무거움을 덧입거나 혹은 반대로 무거운 인물이 가벼움을 가장할 때가 있다고, 그걸 포착하면 학생 또한 작중인물들에게 연민을 품게 될 거라 하신 것도.

근래 우연한 계기로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며 예전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 일었다. 특히 토마시에 대해 그랬다. 스무살에는 바람둥이의 면모만 눈에 들어왔는데 이제 동일한 글에서 다른 것들이 읽혔다. 여성편력이 심한 토마시가 자기 직업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사소한 부분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으려는, 외과의사의 재능과 지위를 전부 내려놓으면서까지 당에 반발하며 고집을 꺾지 않는 모습이 그것이었다. 관점에 따라 이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사생활은 문란한’ 식의 위선으로도 보이겠지만, 내게는 오히려 정반대로 닿았다. 공동체의 성윤리 차원에서는 가볍다고 비난받아 마땅할 인물이 공동체 안에서 지켜가고자 하는 어떤 가치의 형형한 실존적 무게. 그것이 숭고하게마저 느껴졌다.

한편 떠나간 연인 사비나에 사로잡힌 채 그럼에도 누군가를 기꺼이 맞이하기 위해 배려하고, 신념의 껍데기만 남은 상태로 그럼에도 시위에 참여하는 프란츠 역시 이해할 것 같았다. 스무살에는 우둔하게만 보였던 그의 행동들이 무거운 자아를 지닌 자가 거기 압사당하지 않고 살아내려는 몸짓으로 읽혔다. 당시 그 선생님이 말씀하신 가벼운 인물이 무거움을 덧입거나 무거운 인물이 가벼움을 가장하는 찰나들이 혹시 이런 것일지 생각하였다. 나도 나이를 먹어, 그 순간을 포착하고 연민과 애정을 품게 된 것일까.

이제 ‘소개팅’도 ‘정류장 바래다주기’도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도 옛것이 되었지만, 갓 사랑을 시작할 혹은 몇 차례 풋사랑을 지나온 스무살 여러분께 이 책을 권한다. 스무살의 나처럼 다 읽고 나서 작중인물들에 반발감이 솟는 학생은 언제든 찾아오기 바란다. 사범대학 2호관 3305호로. 작품에 관해 하고픈 긴 이야기는 그때 들려주기로 한다.

저작권자 © 제주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