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자리 -과학의 마음에 닿다 (전치형, 2019, 이음출판사)

“이제 과학은 교양이다” 이 문구가 낯설지 않다면 당신은 이미 ‘과학하는 사람’이라고 불려도 될 것 같다. 언어학에서 ‘xx하다’라는 범주의 동사는 경동사(light verbs)라고 불린다. 이런 동사류는 동사+목적어의 복합 술어 구문이 목적어의 동사형과 형태적으로 동일하며, 동사 자체가 그렇다한 의미를 추가로 지니지 못한다는 의미적 특징을 가진다. 영어로 dance와 do a dance는 알기 쉬운 예이다. 한국어로는 ‘이메일-이메일하다,’ ‘카톡-카톡하다’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뚜렷한 특징의 의미적 가감이 없는데도 경동사 구문은 왜 등장하게 된 것일까? 이는 단순히 행위의 표현방식이 필요해서인가? 왜 명사만으로는 만족되지 않는가? 경동사의 탄생과 관련하여 그 저변에 깔렸을 심리적 필요를 ‘과학하다’라는 동사로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게 됐다. 

전치형 작가의 ‘사람의 자리-과학의 마음에 닿다’는 실천적 과학에 대한 작가의 몇 년간 집필을 하나로 묶어놓은 책이다. 하루가 다르게 업데이트되는 과학 기술은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일들을 매일매일 현실로 산란케 한다. 깜짝 놀랄 만한 과학적 혁신이란 말이 이제 차츰 무감각해지려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런 변화무쌍한 과학의 시대에 작가는 과학만 보지 말고 그 과학과 함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라고 공들여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과학이란 어떤 것인가? 자율 주행차 개발과 관련한 인간 존재의 의미와 성차별의 찰나를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과학자의 양심은 왜 중요한가? 시민 과학자로서 과학정책을 어떻게 비판할 수 있는가? 과연 누군가를 위한 과학은 어떤 과학이어야 하는가? 지구온난화와 같은 자연 재앙에 직면하는 과학, 세월호 사건과 같은 사회제도적 재앙에 대처하는 과학, 인간 평등과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과학의 소명 등등. 과학은 삶의 현장과 동떨어진 채로 절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과학 세상은 사람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건재하게끔 해야 한다고 작가는 또박또박 짚어내고 있다.   

이런 고민은 과학도만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과학하다’란 용어는 대중의 언어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전치형 작가의 제언은 이런 편견에서 탈출할 것을 촉구한다. 그는 ‘과학하다’의 의미를 누구나의 일상의 문제로 환원시켜, 과학자로서의 일반 서민의 눈높이와 역할을 고민토록 한다. 역사학자 전우용의 ‘로봇’에 대한 최근 글귀를 언급해도 좋을 것 같다. 사람들을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킬 로봇을 설레며 기대할지 아니면 그런 로봇이 앗아갈 직장과 더 나아가 로봇의 지배를 두려워해야 할지에 따라 현대인의 미래관이 달라진다는 그의 언급은 명쾌하다. 이 역사학자는 또 말한다. 신과 같은 지위를 얻게 될지도 모를 로봇의 지배에서 해방되기 위해선, 로봇이 결코 대신할 수 없는 인간만의 성질을 더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과학하는’ 사람의 시선과 입장이 또다시 강조되는 글귀이다.           

나도 이참에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다. 4차 산업혁명(혹은 4차 과학혁명)의 여파가 범람하는 요즘이 되어서야 ‘과학하다’라는 동사는 왜 등장하게 되었나? 이 동사의 등장은 온실과도 같은 연구실에서의 추상적 과학이 아닌 우리 삶터에서 행동하는 과학의 면모를 일깨우고자 하는 사회의 심리적 욕구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이제 ‘과학하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어떻게 정립해야 할지를 고민할 시간인 듯하다. 일반 시민으로서 ‘과학하는 나’는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 것인가? 또한 그 시선은 누구와 누구를 향한 것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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