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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 청년들 민주화운동 역사 학습하다종속적인 한미관계 자주적으로 이끌어야
5월 6일 제주도내 청년ㆍ청소년이 함께 5.18민중항쟁 을 주제로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제주도 내 청년 및 청소년들이 건입동 ‘꿈들’에서 5월 6일 ‘제주4·3과 광주5·18을 잇다’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이 행사는 제주대학교 학내 동아리 (쿰, 평화나비)가 주최했다. 이들은 4월과 5월에 5·18 광주 민주항쟁과 관련된 사전 세미나를 진행하고 5월 17일부터 현장답사를 위해 광주로 기행을 떠난다.

이번 세미나는 광주에 방문하기 전 사전 배경을 학습하는 자리이자 나눔의 장이 됐다. 이에 기자는 2번에 걸쳐 광주민중항쟁을 알아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광주민중항쟁의 배경

1979년 10월 박정희 정권 당시 차지철(경호실장)은 “신민당이 됐건 학생이 됐건 탱크로 밀어서 캄보디아처럼 2, 3백만 죽이면 조용해진다”라는 언급을 한다. 그를 저지하기 위한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결국 박정희는 김재규에 의해 사망하고 뒤이어 전두환은 12·12쿠데타를 통해 신 분부 중심 세력으로 등장한다.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선거에 의해 전두환은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이후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은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박정희 사망 이후 억눌려 있던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각계각층에 시위로 분출되기 시작한다. 

5월 17일 전국적 계엄령이 선포됐고 광주에서는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오전 10시 전남대학교에서 도청까지 행진하는 시위가 벌어진다. 19일 광주서 최초 희생자가 발생한다. 이는 바로 청각장애인이었던 고 김경철씨다. 장애를 갖고 있던 김씨는 계엄군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해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21일 광주의 10만명의 시민이 금남로 거리 앞으로 모인다. 이날 지나가던 행인의 증언이 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공개된다. “콩 볶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사람이 하나둘 피를 흘리고 쓰러지더라”

이날 신군부는 조준 사격 발포허가를 내렸고 암묵적 사살목적으로 광주의 시민들을 향해 조준발포를 행한다. 이후 시민군은 경찰서와 군 기관을 습격해 총구를 뺐어 자체무장에 돌입한다. 25일 부산항으로 글라이스틴 미군정이 지원 온다는 소식을 들은 광주의 시민들은 환호한다. 하지만 한미관계에서 자주권은 묵살되고, 미군은 신군부세력의 일원이었음이 드러난다.

이날 세미나는 제주대 임원섭(컴퓨터교육학과)씨가 진행을 맡았다.

이날 임씨가 준비한 세미나는 기존 교과서적으로 학습한 역사와는 사뭇 달랐다. 80년 광주의 금남로 거리를 재현했고, 구수한 사투리로 그날 현장의 모습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날 임씨는 민주화운동의 정식명칭이 재검토되길 희망했다. 민주화운동과 항쟁은 엄연히 다르며, 정식명칭은 역사를 기억하는 민족들에게 중요한 근간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항쟁의 의미는 부패한 권력을 끌어내리기 위해 맞서 싸운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임씨는 세미나를 마치며 “40년대 제주와 80년대 광주는 레드컴플렉스의 대상이었다. 빨갱이의 섬, 빨갱이의 지역이란 정부의 낙인으로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됐다. 분단의 역사에서 반공은 당연히 자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고 말하며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종속적인 한미관계를 보다 자주적으로 이끌어 가는 길이다”며 “4·3과 5·18의 배후에 숨어 있던 미 제국은 명백한 진상조사와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 고 말했다.  이번 세미나에 참여한 장현우씨는 “지금까지 교과서로만 배우던 역사와는 달랐다”며“ 실제 광주에서 나고 자란 이에게 들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더라”고 생생한 소감을 전했다.

전예린기자  webmaster@jeju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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