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부터인가 노동시장과 결혼시장에서 아름다움은 아주 강력한, 다른 어떤 것보다 완고하고, 우선적인 인간 판단 기준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외모지상주의(루키즘, Lookism)이란 조어까지 만들어졌다. 초등학교 학생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외모 가꾸기에 열중한다.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지울 수 있는 화장이나 문신, 밥 굶기는 너무 원시적인 방법이다. 이제는 아름다움을 위해 첨단과학을 동원하여 살점을 제거하고, 태우고, 뼈를 깎아내고, 이물질을 삽입하고, 피를 흘린다. 우리는 치료적 목적이 아닌 이런 행위를 고문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는 자발적이란 이유로 문제 삼지 않는다. 또 그 자발성 때문에 그 엄청난 가격과 부작용도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것이 된다. 과연 이러한 아름다움 추구행위를 자발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의 어떤 인간들도 아름다워지고자 하였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자연스런 현상이며, 그 행위는 즐거움을 동반한다. 그러나 미에 대한 추구가 더 이상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수사항이 되어버릴 때, 그것은 더 이상 자발적인 즐거운 일이 아니다 .

  그 아름다움의 모델이 바비인형과 같은 체형이 된다면, 어느 탈랜트의 코, 배우 누구의 입 모양이 된다면, 동양인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획일적이고 도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그 기준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자발적일 수 없다. 또 한 성, 여성에 대해서만 그렇게 지독하게 요구되는 것이라면 더더욱 자발적인 것은 아닌 것이다.

  취업을 위해, 결혼을 위해, 보다 나은 인간관계를 위해 다이어트를 하고, 성형을 한다. 그러나 이른바 용모단정한 여성을 요구하는 직장이 제공하는 자리는 하급직, 임시직이기 쉽고, 부서 배치나 승진에서는 바로 그 여성성 때문에 불리해진다. 높은 자리는 또 다른 자격과 자질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외모로 얻은 더 나은 배우자, 더 나은 인간관계가 실제로 인생에서 더 높은 성취감과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높아진 코로 인한 높아진 자존심은 더 높아지기 위해 광대뼈를 깎도록 부추기는 것은 아닌가. 도톰해진 입술은, 잘록해진 허리는 얼마나 오래 매력적일 수 있는가. 숨막히게 갑갑한 삶이 날씬해진 종아리로 빵빵하게, 쭉쭉 뻗어갈 수 있는 것인가.

  몸을 끊임없이 공사장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되고, 성형중독까지 이르는 광기와 같은 아름다움에 대한 이 바람은 어디서 연유하는가? 국세청에 따르면 외모 가꾸기에 관련된 산업의 모가 연간 5천억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은 정확하게 세원이 잡혀지는 경우일 뿐 정확한 추계는 어려운데도 그 정도다. 후기산업사회에서 자본은 더 큰 자본을 위해 몸을 자산 삼아 아름다움을 소비하게 한다. 이러한 아름다움에 대한 의무를 여성들에게 더 가혹하게 요구하는 것은 여성을 노동력, 결혼상대, 혹은 인간관계의 상대자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같은 소비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고리타분하게 외적 아름다움이 내적 미보다 더 낮은 수준의 것이라고, 인위적인 것은 모두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 성형 한번 하는 비용으로 굶주리는 아이 몇 명을 살려낼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왜 아름다워지기는 여성들의 의무이고, 그 아름다움 감상하기는 남성의 권한이 되는가. 아름다움은 애초 인간 모두가 가지는 속성이요, 누구나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남자도 외모 가꾸기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제 아름다움을 여성성과 동의어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성 시대에 인간의 능력, 자질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왜 꼭 그러한 육체적 아름다움이어야 하는가? 힘, 용기, 지식, 신뢰가 가는 행동, 남을 배려하는 능력, 이런 것들이 외모를 대치하는, 아니 적어도 같은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는 기준이 될 수는 없는가. '기왕이면 다홍치마'라 하지만 누군가는 초록치마 또 누군가는 검은 바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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