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학생들 모여 평화에 대한 생각 나눠
이유없이 희생당해야 했던 역사 공유해
과거의 역사 기억ㆍ계승의 문제 안고 있어

>> ‘평화에 대한 생각’ 발신ㆍ교류ㆍ계승 연수

‘평화의 초석’ 전경(위). 배봉기 할머니, (1914~1991) (아래, 출처=한겨레21).

지난 10월 11일에서 20일까지 오키나와에서 <‘평화에 대한 생각’ 발신ㆍ교류ㆍ계승> 연수가 열렸다. 대만, 베트남, 오키나와, 캄보디아, 그리고 제주 학생들이 모여 평화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자리였다. 

제주에서는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고성만 교수님의 지도로 사학과에서 교류수학 중인 고애리, 한국학협동과정 박사 과정 류진옥, 사학 박사 과정 신소연, 국어국문학 석사 과정 문보미, 사회학 석사 과정 염현주가 참여했다. 

오키나와현에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전쟁의 역사가 있었고, 그 가운데 조선인들의 역사도 존재했다. 그 중, 1945년 8월 20일 오키나와 구메지마에서 학살당한 구중회 일가의 희생은 전쟁으로 사라진 이름 없는 죽음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944년 오키나와 도카시키지마에 끌려와 1972년 불법체류자로 분류되어 특별체류 허가를 받기 위해 최초의 성노예 증언자가 된 배봉기 할머니는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가까스로 목숨은 지켰으나, 지독하게 외로웠던 생애를 보냈다. 

이 모두 식민지, 전쟁, 조선, 일본, 그리고 미국을 둘러싼 역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4ㆍ3 또한 이 역사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 1910년 시작된 조선반도의 일제강점기는 1945년이 되어서야 끝이났다. 종전 후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한 갈등이 시작됐고, 소련과 미국의 대리전으로 조선반도는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는 비극을 겪었다. 남조선의 이승만 정권은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남한만의 선거를 치루고자 했으나 분단을 거부했던 제주도민은 단독 선거 반대 운동을 결행했다.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제주도민의 반대 운동을 사회주의 운동으로 규정한 이승만 정권과 미국은 대대적인 학살로 제주도를 빨갱이 섬(Red Isalnd), 그리고 죽음의 섬으로 몰아넣었다.

4ㆍ3은 수많은 이름 없는 죽음을 낳았다. 1947년 3월부터 1954년 9월, 총 7년 7개월의 기간 동안 3만여 명에 달하는 당시 제주 인구 1/10이 희생당했다. 그리고 이제 71년이 지났다.   

오키나와 평화 기념공원에서 연수를 시작했다. ‘평화의 초석’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만, 그리고 아직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비석까지 오키나와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이 함께 모셔져 있다. 우리는 제주에서 들고 간 한라산 소주로 모셔진 분들의 이름과 아직 새겨지지 않은 이름을 함께 씻어 드렸다.  

또한 1945년 오키나와 전투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통한의 공간들을 중심으로 많은 현장을 방문했다. 히메유리 기념관에서 우리는 일상에서 전장으로 가는 길을 봤다. 일본군은 교사를 꿈꾸던 15~19세의 여학생들을 ‘히메유리 학도대’란 이름으로 방공호에 배속했고, 그들에게 부상당한 일본병들을 치료하는 임무를 내렸다. 그러다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학생들에게 갑작스런 해산명령이 떨어졌고 미군의 포로가 되면 강간이나 살해를 당할 것이란 잘못된 교육으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학생들은 자결하게 된다. 

이에 섬에서는 전장에 점령 당한 일상을 목격했다. 민박을 하며 이에섬의 주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고, 미사일 배치 문제와 같은, 오늘날에도 미군의 영향력을 받고 있는 주민들의 삶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고 돌아올 수 있었다. 후텐마 기지에서는 미군기지와 함께 일상 속에 지속되고 있는 전장을 확인하고 실감했다. 주택가의 하늘에 미군 헬기가 뜨고 내리고 그때마다 마을은 굉음에 시달려야 했다.

이 밖에도 오키나와전투 당시 가마에 숨어있던 140여 명 중 83명이 집단적으로 살해 당한 역사를 가진 치비치리 가마(チビチリガマ), 당시 조선인을 기린 한의 비(恨の碑), 사탕수수 노래 비(サトウキビ畑の歌の碑), 오키나와 전을 형상화한 Maruki 부부의 <The Battle of Okinawa> 연작화 전시회, 대만 <台展―潮でつながるとぅないジマ〉 특별전, 미국정 시기의 문화로부터 남겨진 A-sign Bar, 그리고 동양 최대 규모의 카데나 미군기지를 보았다.

이와 더불어, 함께 연수에 참가한 학생들을 통해 다른 나라의 역사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역사 속에는 열강들의 갈등으로 이유 없이 희생당해야 했던 동아시아의 사람들이 있었다. 캄보디아, 대만, 오키나와, 베트남, 그리고 한국은 모두 이러한 역사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 

길게는 70여 년, 짧게는 40여 년이 흘렀다. 참가국의 역사 모두 기억과 계승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사건의 진상이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개별 국가 내에서도 기억을 함께 공유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는 평화에 대해 생각하고 그 생각을 교류하고 확산하기 위해 오키나와에 모였기 때문에, 참가국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억의 계승을 구축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체험자와 생존자의 증언을 기록하고 전승하는 방향, 희생자의 유해를 발굴하고 진심 어린 위령의 방법을 구축하는 것, 다음 세대에게 계승되는 평화 교육의 다각화 등에 대해 각 나라의 경험을 공유했다. 

그리고 우리는 ‘평화의 경계’와 ‘평화의 언어’라는 주제를 도출했고, 오키나와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발표를 통해 평화를 위한 좀더 근본적인 성찰을 제안했다.

먼저, ‘평화의 경계’다. 4ㆍ3은 대한민국 중앙정부의 제주도민에 대한 학살 사건이다. 오키나와전투 당시 미군과 일본군에 의한 오키나와인의 희생은 아주 막대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으나 아직 진실은 불명확하다.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평화는 국경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경, 민족, 국가 등의 벽을 넘어 인간의 존엄을 지켜나가는 평화의 길을 모색하자고 제안했다.

다음으로 ‘평화의 언어’다. 누구의 시점에서 평화를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함께 평화의 언어를 다시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배자ㆍ가해자의 시선이 아닌, 피지배자ㆍ희생자의 시선에서 지난 역사를 거꾸로 보는 것, 이렇게 재정립된 언어로 가해자의 영역까지 확산할 수 있는 평화의 언어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국가와 종교, 그리고 이념을 넘어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길, 평화는 결과가 아니라 이 길을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키나와의 역사, 오키나와의 고뇌, 오키나와의 실천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왔다. 또한 대만, 베트남, 캄보디아의 역사와 제주의 역사를 다시 한번 돌이켜볼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 배움을 통해 평화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고자 한다. 뼈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평화를 향해 나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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