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세상, 커피숍 이름이다. 커피숍 이름으로서는, 내가 아는 상호 중 최고다. 아직 어린 두 딸의 손을 잡고 가끔 들르기도 하는 곳인데, 그 때마다 누가 이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지었는 지 궁금해진다.

  주인에게 물어볼 생각은 없다. 그러면 시시해진다. 분위기를 살피며 그냥 추측해 보는 게 낫다. 그만큼 상상이 더 자유스러워지니까.

  이 상호를 마주한 첫 느낌은, 지금도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가 하는 놀라움이었다. 그래,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꿈꾸는 사람들은 남아 있는 법이지. 그리고 어떤 추억 같은 것이었다.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넘쳐났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지나친 점도 있었고, 잘못된 점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 대학에는 열정이 넘쳐나고, 토론이 넘쳐나고, 또 읽어야 할 책들이 쌓여 있었다.

  혼란스럽고, 어쩌면 고통스럽기도 한 시절이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통속적이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 그 때가 그립다. 대학에 충만해 있던 그 ‘생명의 비약’이, 그 정의감이, 그 이상주의가 다 어디로 갔는지.

  안타까운 것은 사라져버린 옛 이념이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념에의 의지다. 아직도 세상은 만족스럽지 않고, 세상은 영원히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라고 해도, 또 다른 세상을 지향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미래는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세상을 꿈꾸지 않는다면 사실 대학도 없는 것이다. 서구어 ‘university’를 한문어 ‘大學‘으로 번역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university든 大學이든, 그것은 사상과 철학과 정신이 깃든 말이다. 단순한 직업학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세상이 어떤 세상이어야 하는지 독선적으로 규정짓지는 말자. 여러 ‘다른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여성주의의 목소리가, 환경주의의 목소리가, 새로운 공동체주의의 목소리도, 여러 형태의 소수자들의 목소리도 들려오고 있다.

  고민과 모색의 시대인 것이다. 이념이 죽은 시대가 아니라 새로운 이념이 논구되고 논구되어야 하는 시대임에도, 대학에는 좌절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지금 정말로 대학을 죽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좌절의 분위기에서 정당화되는 냉소와 안일이라고 생각한다.

  커피숍도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데, 대학이 또 다른 세상을 꿈꾸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학 어느 한 구석에 꿈꾸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안다.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작은 커피집처럼. 대학의 희망은 거기에서부터 다시 시작될 것이다.

  커피숍 ‘또 다른 세상’은 그 단어의 선택에서부터 페미니즘적 색채가 강한 것 같은데, 혹시 또 다른 뜻이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저 내 어린 딸들에게 ‘또 다른 세상’에 대한 추억을 심어주고, 희망을 전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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