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다 희

사회학과 2

재수를 한 친구는 좋은 대학이 자신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하며, 소위 말하는 ‘탑텐’에 드는 대학을 가는 것이 큰 메리트라고 여겼다. 

나는 실수로 과제를 제출하지 못하면 스스로에 대한 짜증이 났다. 그 실수로 인해 떨어질 미래의 점수를 참을 수가 없었다. 대학에서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혹은 얼마나 잘했는지가 환산된 점수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지만, 취업시장에서 내 대학생활은 그 숫자만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위 사례들은 우리나라의 학벌주의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개인은 사회가 만들어낸 사회를 전부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당연히 추구하고 있던 것들이 알고 보니 모두 사회화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지금 쫓고 있는 것들은 사회가 우리에게 지정한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은 ‘나’를 통해 사회를 볼 수 있다.

현재 우리는 돈을 조금 더 주는 곳, 더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기를 원한다. 그런 일자리는 사람을 선별하기 위해 일정한 방법을 택한다. 12년간의 의무교육을 받은 결과는 줄 세우기식의 입시로 나타나고, 대학을 나오고 난 뒤 남는 것은 모두 대학의 이름 아래에 있게 된다. 사실 우릴 뽑는 사람들도 단지 그 수치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평가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뽑는 사람도, 뽑히는 사람도 가진 것은 대학교 이름과 학점이 적힌 학벌주의라는 이름의 종이 한 장뿐이다. 지금 사회는 종이를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데 취업 기회의 공정성이 계속해서 논의되고 있다. 왜일까? 우리는 생계를 위해서 계속해서 취업시장에 뛰어든다. 그럴수록 더 많은 선별이 필요하고, 학벌주의는 더욱 유용한 수단으로 자리 잡는다. 

학벌주의는 심화되는데, 취업하고자 하는 사람은 늘어나거나 혹은 여전하다. 그 상황에서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게 해주세요’는 ‘경쟁하지 않을 겁니다’보다 더욱 쉬운 말이다.

공정한 경쟁 기회의 보장은 경쟁을 조장하는 사회에서 사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같은 방향으로 뛰어가서 등수별로 회사에 취업하고 나면 그 후에는 시키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것은 없어진다.

살기 위해 학벌에 집착했지만, 그걸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회사 없이는 설 수 없게 된다. 우리 모두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투자했는데, 내 미래는 도박의 확률처럼 불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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