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의 현대교과서’라 불리는 故 김중업 선생과의 만남
1964년 건축계의 거장 김중업 선생이 설계해 1970년 완공
모더니즘 반영해 20세기에 지어진 ‘21세기 건축물’로 꼽혀

>> 제주대학교의 옛 본관은 어디로

故 김중업 선생.

◇ 제주대학교 본관의 역사

제주대학교의 전신은 1952년 8월 개교한 제주초급대학이다. 제주향교를 임시로 빌려 대학이 설립됐다.

1955년 도립 4년제 대학에 이어 1962년 국립대학으로 승격됐다. 이 해부터 1981년까지 19년 동안 제주대학교 캠퍼스는 용담동(현 제주대사범대학부설고)에 있었다. 용담캠퍼스 본관 건립은 국립대학 승격 직후에 추진된 주요 사업이었다.

한국 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김중업 건축가가 1964년 설계했고, 1965년 국전(國展: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출품돼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김중업은 제주대 옛 본관에 대해 “20세기에 지어진 21세기의 건축물”이라고 표현했다. 지금의 건축디자인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그만큼 시대를 앞서나간 건축물이었다. 제주대 옛 본관을 시작으로 한국 건축에 본격적인 모더니즘이 수용됐다. 

정부가 제 때 예산을 지원하지 않아서 공사는 늦어졌고 1970년에야 완공됐다. 설계 당시 정확한 건물명은 ‘제주대학 법문학부’. 도서관과 교수연구실, 회의실, 박물관, 학생식당, 행정실이 포함된 다기능의 복합시설이었다. 건축연면적 1900㎡에 4층 규모로 신축됐다.

제주대 옛 본관은 ‘한국 모더니즘 건축의 효시’로 불렸다. 현대건축의 원리와 한국의 정서를 융합시킨 걸작이란 평도 더해졌다.마치 미래도시를 연상케 하는 건축물이었다. 2층과 3층을 연결한 경사로의 기하학적인 곡선은 바다가 가지는 생명력과 제주의 역동적 이미지와 부합됐다.

교수 연구실로 사용했던 3층은 마치 날아가는 비행기나 바다 위에 떠 있는 선박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 현대 건축사의 한 획을 긋는 작품으로 평가를 받았다. 김중업은 자서전인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의 표지 앞뒤로 주한프랑스 대사관과 제주대 옛 본관의 사진을 게재했다. 그의 혼과 열정이 담긴 대표작임을 증명한 셈이다.

제주대 옛 본관은 바다 인근에 들어서면서 해풍의 영향을 받았는데 외벽 콘크리트 타설 작업에도 바다모래가 들어갔다. 강모래보다 염분함유량이 16배나 많은 바다모래를 사용하면 철근이 쉽게 부식돼 콘크리트 구조물 강도가 떨어지고 벽면이 쉽게 갈라진다.

여기에 내부 공간의 잦은 변경으로 1985년에 이어 1992년 누수현상이 발생했고, 붕괴 위험도 제기됐다. 

옛 본관 건물을 둘러싸고 보존과 철거 논쟁은 당시 한국 건축계의 중요한 이슈가 됐다.

1993년 한국 건축계와 지역 문화계가 뭉쳐서 보존 운동을 전개했다. 서울에서 원로 건축가 80여 명이 제주에 왔고, 도내 문화예술계 원로들도 힘을 모아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한국 현대 건축사의 중요 사료이고 제주도의 문화유산’이라는 성명에 이어 기필코 건강하게 재생돼야 한다는 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옛 본관 건물은 3년간 보존과 철거를 놓고 지루한 논쟁을 벌이면서 붕괴가 더욱 가속화 됐다. 대학 당국은 근시안적 태도로 일관했다. 건물 활용에 난색을 표명하면서, 보수비용도 확보해 놓지 않았다. 결국, 1995년 제주대 옛 본관은 철거됐다.

예술성과 상징성, 역사적 가치를 넘어서 한국 건축사에 영원히 남을 건축 작품이 새로운 생명을 얻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한국 현대 건축의 효시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일방적인 철거에 대해 도민들은 제주대학교 발전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사진에서만 볼 수 있게 됐다며 한탄했다.

이 건물과 함께 제주대학교 옛 서귀포캠퍼스의 농학부 본관과 도서관, 그리고 수산학부 본관도 김중업 건축가의 작품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모두 철거됐다. 

반면, 김중업이 1956년 설계한 건국대학교 도서관(현 건국대 언어교육원)은 65년이 지난 지금도 활용되면서 ‘건축학의 현대 교과서’로 꼽히고 있다.
 
◇ 김중업 건축가는

故 김중업 건축가는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39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 일본에 건너간 그는 1941년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현 요코하마국립대학)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3년간 일본에서 가장 큰 마쓰다-히라다 건축사무소에서 일했다.

1944년 귀국한 그는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조교수를 역임했다.

6ㆍ25전쟁 때 부산에 머물던 그는 1952년 9월 유네스코 주최로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제1회 세계예술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베니스에서 그는 세계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를 만난다. 이후 김중업은 파리에 있는 르 코르뷔지에 아틀리에로 찾아간 후 1955년까지 3년간 그의 건축사무소에서 일했다. 파리에서 공부한 그는 한국 현대 건축을 이끌어 갈 거장으로 성장했다.

1956년 귀국한 그는 서울 종로구에 김중업건축연구소를 열었고,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김중업은 주한프랑스 대사관(1960), 유엔기념공원(1963), 제주대학교 본관(1964), 서산부인과 병원(1965), 부산 UN묘지 정문(1966), 삼일빌딩(1969)을 설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건축가로서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와우아파트 붕괴, 청계천 주민 성남 강제 이주 등 박정희 정권의  무분별한 개발 정책을 비판했다. 김중업은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혀 1971년 가족을 남기고 해외로 추방당했다.

1978년 11월 귀국한 그는 1988년 5월 11일 6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가 남긴 건축물 가운데 ‘부산 유엔기념공원’, ‘부산대 구 본관’, 서울 ‘서산부인과’ 등은 등록 문화재로 지정됐다. 주한프랑스 대사관은 대사관 측의 반대로 등록 문화재에 오르지 못했다. 

경기도 안양예술공원에는 그를 기념하는 김중업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김중업 박물관은 매주 월요일 휴무이며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김중업박물관에 전시된 제주대 옛 본관 모형물
제주대 옛 본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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