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인체조각을 하는 작가이다. 인체조각의 장르도 여러 가지가 있으나, 본인의 경우는 모델링을 통한 사실적인 인체를 제작하고 있다. 모델링의 방식은 인체를 대상으로 놓고 관찰하는, 신체를 물질로 대하는 것 같은 그 시선의 방식 때문에, 서구 인체조각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지 100여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부자연스럽게 대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이러한 모델링의 전통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한다. 인체의 완벽한 비율을 미의 기준으로 삼았던 그들에게, 아름다운 비율을 가진 조각상은 단순히 그 겉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조화로운 비율의 이상을 실현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모델링은 인체를 감성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고, 비율이 아름다운 신체를 찾아 이들을 실측하고 통계 내어, 미의 이상을 수치화하는 이성적인 활동이었다. 더불어 플라톤이 그의 <향연>에서, 인간의 사고가 이데아로 이르는 방식으로 ‘미적 수준론’을 논하면서, 고대 그리스에서 미는 점차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의 조각은 아름다운 인간이 아닌, 완벽한 비율을 실현하는 신상神像이었다.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도 미적 이상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불상이 제작되었다. 과거 동양의 지배적인 미적 이념을 섣불리 정의내리기 전에, 상식적으로도 우리 선조들이 불상을 제작할 당시, 그 비율을 미적 이상으로 두었을 것 같지는 않다.

  이처럼 인체조각도 비록 인체라는 대상을 다루고 있지만, 그 근저에는 문화적인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통해 전개되어 왔다. 그렇다면 고대 이래의 형이상학적 정신사와 근대의 유물론적, 과학적 시선을 거쳐 지금 내 앞에 선 인체조각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의 경우에 인체조각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조각을 처음 시작하면서 였다. 하나의 기초로 끝났을 수도 있었을 이 과정에서, 인체를 관찰하다 인체의 그 조그만 형태의 변화와 움직임에 개인적인 감정과 사고가 이입되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인체를 가만히 관찰하다 보면 그 기능성에 놀라게 된다. 발바닥이 아치형으로 이루어져 충격을 잘 흡수한다던가 하는 일반적인 경우를 차치하고 라도, 유기적으로 서로 상쇄하면서 정확한 리듬아래 움직이는 근육들을 보고 있노라면, 동양전통의 음양사상이 바로 여기서 이런 모습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감탄하게 된다.

  이러한 신체의 발생은 더욱 신기하여 무한한 상상력 속에서 그 기원을 탐구하게 된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인체는 단순히 한 개체의 신체가 아니라, 인류라는 계통발생의 역사 속에 서 있는 신체가 된다.

  그리고 이 인류라는 계통발생의 가지가 닿아 있는 생명이라는 거대한 줄기의 계통발생에까지 시야를 확대하면, 우리 몸 하나 하나가 담지한 생명의 거대한 역사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모습, 행동양식 취향 등은 우리의 것이기도 하지만 인류 역사의 오랜 기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인체 각 요소들 못지 않게 유기적인 관계를 지닌 사고의 표정들도 보게 된다. 인체는 정신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정신의 표정이 된다. 인체의 반응을 호르몬과 전기 자극 등으로 설명하는 신경 생리학적인 관점도 있지만, 그 반응의 동인과 결과로서 인간사와 관계 맺는 정신적인 요소의 중요성은 배제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본인의 생각들은 신체를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로 본 것이 아니라, 현상적으로 실현된 생명의 이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앞서의 관점들과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인체조각은 이러한 신체이해를 나 자신의 몸을 통해 투사하는 과정이다.

  우리의 몸은 생명의 현현으로서, 그 존재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다. 여기에 신체에 대한 최근의 태도를 덧붙인다면 오히려 사족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굳이 언급하자면, 신체는 다양한 가능성의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그 하나의 가능성인 외형적인 측면으로만 대하지 말자.

  무엇보다 자신의 신체를 소중히 하고, 그 안의 생명을 체험하자. 그리고 사랑하자. 이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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