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 밭에서 / 김경훈 / 각 / 2021

제주 BOOK카페 <9>

제주 리얼리즘 문학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김경훈 시인의 시집 『수선화 밭에서』의 표지는 수선화처럼 하얗다. 그는 지금까지 4ㆍ3 유적지, 강정 해군기지 건설 현장, 제2공항 갈등이 첨예한 현장에서 시를 써왔다. 
시의 진면목은 그의 낭독을 통해 나타나는데, 실제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이기도 한 그가 시를 읊는 것을 들으면 제주 수선화 같다.

그는 4ㆍ3 진상 규명을 위한 취재를 하며 4ㆍ3시를 써왔다. 그래서 수많은 이름들이 억울하게 쓰러져간 것에 괴로웠을 것이다. 4ㆍ3은 각명비를 보면 알 수 있듯 사람들의 이름들로 나열되어 있는 아픔이다. 비석에 이름만 남은 존재들을 불러주면서 이제 조심스럽게 사랑을 말한다. 사랑을 말하는 시인은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사랑의 마음으로 말한다. 

첫 시집 『운동부족』(오름, 1993) 이후 제주의 현장에서 시를 써온 그는 이제 사랑 노래를 하는 점이 부드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러운 노래 같다. 누군가는 이제 기력이 다한 것이라고 말할 테지. 하지만 그의 첫 시집을 몇 해 전에 지역 작가 후배들이 존경의 뜻으로 복간했듯 그의 정신은 계속 이어진다. 그의 시를 읽고, 또 다른 제주의 시인들이 사랑 노래를 이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김경훈 시인은 몇 해 전부터 과수원지기로 일한다. 마치 북에 있던 백석이 실각 후 농장원이 된 것처럼 그는 귤밭에서 닭을 기르며 과수원을 관리한다. 그 일은 이미 오래전부터의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전에도 소작을 했다가 크게 망한 적 있는 그는 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과수원 한편에 컨테이너를 놓고 살아간다. 이름은 창고재(創古齋). 그가 그곳에 들어가 펴낸 첫 번째 책이 이 시집이다. 제주의 역사를 밀고  나간 기저에 있는 사랑을 끌어올려 노래한다. 

과수원지기의 삶을 결정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도시 생활 중 일조권을 잃고 나서다.  거주하던 빌라 옆으로 큰 건물이 들어서면서 햇빛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조천리 산기슭으로 들어갔다. 햇빛을 잃은 시인은 햇빛을 찾아 귤밭으로 들어가 문학의 빛을 이어간다.

‘꽃내음에 취해 죽어도 좋으리 그대 사랑 지천으로 흐드러졌으니 나 여기에 묻혀 꽃이 되어도 좋으리’라는 짧은 시에는 오랜 시간 그가 버텨온 제주의 바람 같은 삶이 들어있다. 이 제주도에 산다는 것은 이 제주의 바람을 느끼는 것인데, 수선화나 사람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시집은 그런 섬의 삶에 녹아있는 사랑가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사랑 없는 역사는 불가능하다. 이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록은 멈추지 않는다. 그가 노래한 수선화 밭은 이제 사랑의 밭이 되어 제주에 활짝 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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