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의 살과 뼈를 갉아먹으며 노리개로 만드는 세계적 관광지 제2의 하와이보다는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서 생활의 보금자리로서의 제주도를 원하기에 특별법 저지, 2차 종합개발계획 폐기를 외치며 또한 이를 추진하는 민자당 타도를 외치며 이 길을 간다.”

양용찬 열사가 1991년 11월 7일, 25년의 아주 짧은 생(生)을 마감하며 남긴 글이다. 그는 부모님에게도 작별을 고했다.

‘아버님 전상서’란 유서(遺書)에서 양 열사는 “고난의 세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모진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해를 넘긴 UR(우루과이라운드)은 당신의 손에서 괭이를 뺏기 위해 칼날을 갈고 있습니다. 당신의 구부러진 허리로 일구어낸 땅을 두 발로 딛고 선 아들은 이 땅의 농군으로 살기를 원하지만 특조법(제주도개발특별조치법)은 괭이 대신 고데들기(시멘트를 바를 때 쓰는 도구)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양 열사의 죽음 뒤엔 현실과 괴리된 상황이 존재했다. 1991년 정부와 집권 민자당은 제주도를 하와이와 같은 국제관광지로 만들겠다는 취지로 제주도개발특별법 제정을 밀어붙였다.

당시 법안에는 정부가 사업을 위해 주민의 토지를 강제로 수용할 수 있고, 수용에 응하지 않는 토지주를 처벌할 수 있다는 독소조항도 들어 있었다.

도민의 압도적 다수가 법안에 반대하는 가운데서도 정부와 여당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양용찬 열사는 민심을 외면한 권력에 항거하는 뜻으로 그해 11월 7일 서귀포나라사랑청년회 건물 옥상에서 ‘제주도개발특별법 반대’ 등을 외치며 온 몸 불 살라 산화(散花)했다. 이로 인해 지역의 문제로만 인식되었던 특별법이 급기야 전국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양용찬 열사는 1966년 남제주군 신례1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서귀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5년 제주대학교 인문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1987년 군에 입대하고 제대했으나 복학하지 않고 줄곧 ‘제주사랑운동’에 전념했었다. 비록 님은 갔지만 그 정신은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양 열사 30주기인 11월 7일 전후로 추모문화제 등 각종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시인 김경훈은 고(故) 양용찬 열사 추모제에 부쳐 ‘그대는 분노로 오시라’는 시를 발표한 바 있다. “불로 가신 그대여/다시 오실 때에는 물로 오시라/절망으로 가신 그대여/다시 오실 때에는 희망으로 오시라/불의에 맞서 가신 그대여/다시 오실 때에는 시퍼런 의로움으로 오시라/ <중략> /눈물로는 오지 마시라/한숨으로도 오지 마시라/반성하고 수고할 줄 모르는 우리들/오만한 아집을 삭일 찬 서릿발로 오시라/분노가 진실한 정의가 되게/그대는 맞불의 분노로 오시라”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달라졌고, 제주는 또 어떻게 변했는가. 지금도 여전히 과잉개발이 넘치고 구럼비 바위가 폭파되는 현실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그대는 분노로 오시라’는 시인의 심경을 이해할 듯도 하다.

관심은 곧 사랑이라고 한다. 양용찬 열사를 기리는 추모행사를 통해서라도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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