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침입에 대비, 민·관·군 힘을 모은 역사적 산물
조선 후기에 3성·9진·25봉수·38연대로 방어시설 확대

한경면 두모리에 있는 두모연대(頭毛煙臺)
1872년 제주삼읍전도에 표시된 3읍성과 9진, 25봉수ㆍ38연대

한반도와 중국, 일본의 한 가운데에 있는 지정학적 조건은 제주도가 동북아의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4면의 바다로 둘러싸이면서 과거에는 잦은 침략을 받았다. 그래서 제주의 역사는 ‘방어의 역사’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돌을 나르고 흙을 다지며 쌓은 방어유적은 외적의 침략에 자유로울 수 없었던 군사와 백성들의 피땀이 서려 있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3세기부터 약탈을 일삼았던 왜구는 14세기 막부(幕府ㆍ무사 정권)의 교체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됐던 일본 남북조시대에는 해적집단이 아닌 정규군과 다름없는 선단과 병력을 보유했다.

왜구의 제주 침입 기록을 보면 1316년(충숙왕 3)에서 1556년(명종 11)에 이르는 240년 동안 30회에 이르고 있다. 1376년(우왕 2) 왜구가 적선 600척을 동원해 제주를 침입하자 성주 고신걸이 방어했다. 1377년(우왕 3)에는 200여 척이 침범하기도 했다.

왜구가 빈번하게 침입하면서 고려 말 봉수대가 설치됐고, 1408년(태종 8)에는 판옥선 등 전선(戰船) 10척이 제주에 주둔했다.
조정은 국경의 방어를 위해 진(鎭)ㆍ영(營)ㆍ보(堡)ㆍ책(柵)의 군사시설을 설치했다. 제주는 섬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왜구가 배를 가까이 댈 수 있는 해안에 수전소(水戰所ㆍ해군기지)와 방호소(防護所)를 설치했고, 수군은 물론 마병·보병을 배치했다.

이처럼 방어를 강화했지만 왜구의 침입은 더욱 잦았고 치열해졌다.

1552년 천미포(성산읍 신천리)에 왜구 200여 명이 상륙, 주민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를 막아내지 못한 김충렬 제주목사와 김인 정의현감은 유배형을 받았고, 후임 제주목사로 임꺽정을 토벌한 무장 남치근이 부임했다.

1554년 왜구는 또 다시 천미포로 침입(천미포왜변)했으나 민ㆍ군이 힘을 합쳐 왜선 2척을 나포하고 다수의 왜구를 사로잡았다.

1555년 60척의 배에 나눠 탄 왜구 1000여 명은 제주의 관문인 화북포로 침략했다. 이들은 영암ㆍ강진ㆍ장흥을 유린하고 전라도병마절도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을 전사시킨 집단이었다.

화북포로 상륙한 왜구는 남수각 동쪽 언덕에 진을 치고 제주성을 3일간 포위했다.(을묘왜변). 이번 침입은 단순한 약탈이 아니라 제주를 본거지로 삼기 위한 계획적인 침략으로 제주성 함락을 목적에 뒀다.

이에 맞서 김수문 제주목사는 효용군(驍勇軍ㆍ용맹스런 군인) 70명을 선발, 적진으로 돌격했다. 격전 끝에 왜구는 수 백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도주했다.

명종은 목사 김수문의 품계를 올려주고 돌격대로 나선 김성조를 건공장군(建功將軍)으로 제수했다.

미천한 신분으로 갑사(甲士·직업 군인)로 지원한 김성조는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 왜구의 수급을 무수히 베어내 승전을 이끌었다.

1556년에도 왜구가 침입했으나 김수문 목사의 지휘 아래 병ㆍ마ㆍ수군이 왜선 5척을 불태우고 왜구 126명을 사살했다(병진왜변).

병진왜변과 을미왜변을 겪으면서 제주의 방어 체계는 더욱 강화됐다. 조선 전기 3성ㆍ23봉수로 구축된 제주지역의 방어시설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3성ㆍ9진ㆍ25봉수ㆍ38연대로 확대, 재편됐다.

해안 곳곳에는 군대가 주둔한 9곳의 진(鎭)을 설치했다. 9개 진은 애월ㆍ명월ㆍ차귀ㆍ모슬ㆍ서귀ㆍ수산ㆍ별방ㆍ조천ㆍ화북진으로 물결이 잔잔하고 선박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해안 요새에 구축된 ‘포진(浦鎭)’이었다.

진(鎭)에는 판옥선 등 전선(戰船)이 노출되지 않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엄폐된 장소에 들어섰다. 진은 현대의 군대 편제로 보면 800명을 보유한 대대(大隊)급 군사 조직이다.

통신시설인 연대(煙臺)와 봉수(烽燧)는 횃불과 연기로 교신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으나 연대는 해안가 언덕에, 봉수는 고지가 높은 오름에 설치됐다.

해안변 최일선에 설치된 연대(煙臺)는 단순히 통신ㆍ연락 기능만을 한 것이 아니라 자체 방어와 백성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경보시스템 기능도 함께 수행했다.

연대에서는 가까이 오는 배가 표류선인지 적선인지를 분간해 신속히 보고를 하고 대응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왜구를 막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3백리(120㎞)에 걸쳐 제주를 빙 둘러싸고 환해장성을 구축했다. 옛 문헌에 ‘탐라의 만리장성’으로 기록된 환해장성은 지금도 자취가 남아 있다.

현존하는 연대와 봉수는 1894년 근대적인 전신ㆍ전화 통신이 등장하면서 대부분 사라졌고, 남아 있는 것은 원형이 훼손됐다.

구한말 갑오개혁으로 봉수제도가 폐지돼 120년간 역사 속에 묻혔지만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조선의 이동통신’인 봉수를 재현해 관광 자원화에 나서고 있다.

이 같은 방어유적은 민ㆍ관ㆍ군 모두가 힘을 합쳐 외적을 물리치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구축해 국토 수호에 나선 군사시설로, 오늘날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역사 유산이자 상징으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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