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이번 대선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지속되는 가운데 극심한 세대와 남녀 간 시각차를 드러내며 치열한 접전 속에 마무리되었다. 

선거는 승자와 패자를 나누고, 선거 결과에 누군가는 안도하고 누군가는 절망한다. 이번 대선은 우리 사회에 극심한 후유증을 남기는 것 같다. 

그 동안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라고 인식됐던 이십대와 삼십대의 보수 성향이 드러났고, 또한 이삼십대 남녀 간 극심한 표 쏠림 현상도 나타났다. 

더구나 이십대 남자를 일번남과 이번남으로 구분하는 세태까지 등장하는 걸 보면, 이번 대선은 가히 분열의 대선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십대의 보수화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보수와 진보는 일반적으로 기존 체제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나뉜다. 

보수가 기존 체제의 보호를 지향한다면, 진보는 기존 체제의 개혁을 추구한다. 이십대의 청춘이 보수 정당을 지지한다면 아이러니한 일이 된다. 

이는 이 세대가 가진 진보 정당의 정책 실패와 불공정에 대한 분노이거나 이 시대 청춘의 삶에 대한 상실감과 박탈감이 크게 작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진보가 기득권 세력이 되었고, 교체되어야 하는 구체제가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청춘의 삶이 행복으로 점철된 적이 있었을까. 멀리 돌아볼 필요 없이, 지난 정권에서의 청춘의 삶은 어땠을까. 헬조선, 금수저와 흙수저로 나누는 수저계급론 등 청춘의 자조와 절망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그 어떤 시대의 청춘도 시대와의 불화를 겪지 않은 청춘은 없었다. 일제 강점기의 청춘은 일제의 압박을 견뎠고, 50년대의 청춘은 전쟁의 포화를 버텨냈으며, 7·80년대의 청춘은 독재의 폭압을 이겨냈고, 90년대의 청춘은 IMF 구제금융의 덫을 지나왔다. 

어느 시대가 더 힘든 시대였는지는 별론으로 하고, 그 시대를 살아낸 청춘들의 노고와 정신이 시대와의 불화를 이겨낼 수 있었다. 청춘의 삶은 시대와의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미래를 개척하는 삶이었고, 이유 없어 보이는 반항으로 체제의 혁신을 통해 시대의 진보를 이끄는 삶이었다. 

현재의 청춘이 상실감과 박탈감으로 청춘을 허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영끌과 빚투로 대변되는 청춘의 자화상은 우리 시대 청춘의 조급함과 강퍅함을 드러낸다.  물론 지난 시대의 청춘이자 꼰대가 돼 버린 기성세대의 몫이 크지만, 기성세대를 탓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결국은 체제와 기득권을 넘어서야 하는 문제이고, 이는 지금 세대의 청춘이 함께 힘을 모아 극복하여야 하는 문제이다. 이대남과 이대녀로 분열되고, 다시 이대남이 일번남과 이번남으로 쪼개지는 한 청년 문제의 해결은 단지 구호에 그칠 뿐이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 하고, 권리를 위한 투쟁에 나서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권리는 없다. 청춘이 청춘인 이유는 단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기개에 있다. 사회에 대한 명료한 문제의식과 정의와 공정에 대한 명확한 시각, 청춘은 그 올바름으로 항상 푸른 봄(靑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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