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랑쉬굴의 슬픈 노래』/각/2022

제주 BOOK카페 <14>

30년이 흘렀다. 1992년 다랑쉬굴에서 유해가 발굴되었다. 11명의 유골이 깜깜한 굴속에 있었다. 30년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는 여전히 현재진행이다. 포클레인으로 덮어버린 진실 위에서 우리는 여전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게 부끄러운 2022년이다.   다랑쉬굴 희생자 유해 발견이 갖는 의미는 4ㆍ3의 실체를 드러낸 것으로 상징하는 바가 크다. 문서와 증언만으로 알려졌던 수많은 집단학살의 실체가 드러났다. 이 발굴은 4ㆍ3의 역사를 실증적으로 고증하여 4·3의 진상에 대한 상징이 되었다. 동굴 속에 방치된 유골은 은폐와 왜곡으로 점철된 세월을 말한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도 없이 졸속으로 처리된 4ㆍ3 진상조사에 대한 행정의 횡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 1992년 다랑쉬굴 유해 발굴이다.

지금은 표지석이 없다면 그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도 뜻있는 사람들이 벌초를 해주는 덕분에 길이 났다. 사진을 보면, 원래 다랑쉬굴 입구는 매우 좁았다. 한 사람이 뒷걸음으로 해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넓이다. 4ㆍ3 당시 토벌대는 굴속으로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고, 불을 지폈다. 그들이 굴속에서 질렀던 절규는 지금 흙과 돌로 덮여진 채 여전히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문재의 시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44년 만에 햇볕에 드러낸 유골들은 잠시 빛을 보고 다시 잠들었다. 왜 우리는 서둘러 감추려고만 할까. 우리는 그들을 두 번 죽였다. 슬픔을 나눌 장례식조차 제대로 치루지 못했다. 유해가 김녕 앞바다에 뿌려진 날에 다랑쉬굴 입구는 완전히 봉쇄되었다. 발견되면 안 될 것을 들킨 듯 포클레인으로 마구 헤집어 메워버렸다. 다랑쉬굴 4ㆍ3 희생자의 장례식을 도민장으로 치루고 4ㆍ3의 한을 달래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어디 다랑쉬굴 그곳뿐인가. 동광리 큰넓궤, 동백동산 목시물굴, 어음리 빌레못굴 등 살기 위해 숨어든 그곳이 관(棺)이었다. 그곳에 숨어든 사람들은 난리가 곧 끝나 다시 밖으로 나가 농사를 지을 생각을 했을 것이다. 농부는 땅을 떠나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다랑쉬굴에서 유골과 함께 발견된 생활도구 중에는 횃불통이 있다. 그 횃불통으로 칠흑 같은 횃불을 밝혔을 것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햇빛은 들어오지 않고, 총탄이 쏟아졌다. 몸은 육탈되어 뼈만 남은 사진이 보여주는 실체는 공포를 넘는 아득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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