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경성제대 제주시험장, 제주대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 들어서

석주명 선생이 채집한 나비를 들여다보며 연구를 하는 모습
석주명 선생이 1943년부터 2년 동안 머물며 나비 연구를 했던 서귀포시 토평동에 있는 옛 경성제대 제주도시험장 전경

 

서귀포시 토평동에 있는 옛 경성제국대학교(현 서울대학교)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은 1940년대 초반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이 주목을 받은 것은 ‘한국의 파브르’, ‘나비 박사’로 불렸던 고(故) 석주명 선생(1908~1950)이 1943년 4월부터 1945년 5월까지 2년 1개월 동안 연구소장으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은 일본 유학을 계기로 나비와 인연을 맺었다.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에 재학 중 일본곤충학회장을 지낸 오카자마 교수의 지도로 곤충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를 줄곧 눈 여겨 보았던 오카시마 교수는 졸업을 앞둔 석주명에게 한반도에 사는 나비를 연구해보라고 조언했다.

석주명은 1931년 모교인 인천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돌아왔지만 본격적인 나비 연구를 위해 사직하고 경성제대 촉탁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울에서 연구하던 그는 제주도시험장 근무를 지원했다. 제주지역에 서식하는 나비 연구를 완성하기 위해 모두가 꺼렸던 제주도 근무를 자원했다. 그는 제주도에서 나비를 채집, 제주산 나비류 58종을 학계에 보고했다.

석주명은 나비 연구를 위해 20여 년간 제주를 포함해 전국에서 채집 여행을 다니며 무려 75만 마리에 이르는 나비를 채집했고, 형질을 일일이 측정, 비슷한 것끼리 묶어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는 ‘논문 한 줄을 쓰려고 나비 3만 마리를 만졌다’고 했다.

2009년 석주명 포럼 당시 제주를 찾은 외동딸 석윤희씨는 “아버지는 하루에 5시간만 잠을 자면서 연구에 매진했다”며 “나비를 채집하러 집을 나가면 몇 달 후에나 돌아왔다”고 회고했다.

일본 나비학자들이 낸 곤충도감을 비교하던 석주명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일본 학자들은 한국 나비의 종을 지나치게 많이 분류하고 있었고, 그들이 서로 다른 종이라고 구분했던 것은 사실 한 가지 종에 여러 개의 다른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했다. 그의 연구를 통해 한국산 나비의 동종이명(同種異名) 844개가 제거됐다.

석주명의 집념은 한국 나비를 248종으로 분류한 ‘조선산 나비 총목록’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한국인 저서 최초로 영국왕립학회 도서관에 소장됐으며, 그는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오늘날 한국 나비가 모두 250여 종임을 감안할 때 당시로써는 놀라운 연구 업적이었다.

그는 6ㆍ25전쟁 와중에도 나비 연구에만 몰두했다. 전쟁 통에도 피난을 가지 않고 나비 표본을 지켰지만, 서울 시내 폭격으로 국립과학관이 불타버렸고, 그가 20여 년간 수집했던 나비 표본은 모두 재로 변해버렸다. 

나비들이 모두 불탄 열흘 뒤인 1950년 10월 6일, 국립과학관 재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가던 그는 인민군으로 오인 받아 불의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총구를 겨눈 이들에게 그가 외친 최후의 한마디였다. 

그는 마치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듯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 세계에 한국 과학의 위대함을 보여준 그에게 정부는 2017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명예를 헌정했다. 

석주명은 2년 동안 제주도에 머물면서 나비뿐만 아니라 자연ㆍ동식물을 비롯해 지리ㆍ민속ㆍ향토사ㆍ방언 등 방대한 연구결과를 쏟아내 ‘제주학의 선구자’로 꼽히고 있다.

특히 ‘제주도방언집’은 어휘와 음운, 문법을 담고 있어 언어학사에 귀중한 자료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는 나비 종류의 분포 상태를 지도에 표시하는 방법으로 방언 연구에 응용했다. 즉, 각 지역의 대표적 단어(방언)를 지도 위에 표시하는 언어지도를 만들었다.

그는 제주도방언은 다른 지방의 방언과 전혀 다르고, 가장 가까운 전라도방언과 공통되는 어휘는 불과 5%인 것을 알아냈다.

이는 제주도방언집의 7012개 어휘 목록을 선별해 전라도 방언과 공통되는 것을 뽑아 백분율로 산출한 것이다.

그는 1944년 2월부터 1945년 4월까지 1년 2개월간에 걸쳐 9개 면, 16개 마을의 인구를 전수 조사했다. 그 결과를 담은 ‘제주도의 생명조사’는 제주4ㆍ3 이전과 이후의 인구동향을 파악할 수 있어서 학계에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석주명은 당시 16개 마을에 대한 인구조사로 4689가구, 총 2만4936명(외지인 1965명 포함)이 거주했다고 기록했다.

서귀포문화원은 석주명이 발굴 조사한 제주 관련 저서ㆍ유고집 6권을 발간했다.

목록을 보면 제주도방언집(1947), 제주도의 생명조사(1949), 제주도 관계문헌집(1949), 제주도수필(1968), 제주도 곤충상(1970), 제주도자료집(1971) 등이다. 제주도에 머물면서 자연과 동식물은 물론 인문학을 아우르며 다방면에서 많은 연구를 한 그의 업적을 기념, 서귀포시는 2009년 토평사거리에 석주명 흉상과 기념비를 건립했다.

한편 ‘약초원’이라 널리 불렸던 경성제대 생약연구소는 광복 후 서울대학교가 소유했다가 제주대학교로 이관됐다.

현재 제주대학교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가 들어서면서 우수한 감귤 육종을 발굴하고, 아열대 작물에 대한 연구와 동ㆍ식물 자원의 유전자 보존 등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석주명 선생이 머물렀던 이 건물은 지금도 외형이 잘 보존됐다. 사무실 면적은 212㎡(약 64평)으로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양식을 띄고 있다. 이 건물은 2020년 6월 24일 국가등록문화재 제785호로 지정돼 
서귀포시청에서 현재 복원을 서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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