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 전 뿌리내린 불교… 조선시대엔 ‘탄압’받아
척박한 세상 속에서 의지할 수 밖에 없던 ‘불교’
기황후의 영광과 몰락을 간직한 오층석탑

제주시 삼양동 원당봉에 있는 불탑사 대웅전 전경.

지난 5월 8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제주지역 사찰에서는 부처님의 자비와 광명이 있기를 기원하는 봉축 법요식이 열렸다.

제주불교 성지순례길은 2012년 개설됐다. 제주시 애월읍에서 삼양동까지 45㎞ 이르는 ‘보시의 길’은 제주불교의 변천사와 제주도민들이 어떻게 불교와 인연을 맺었는지 보여준다. 

제주시 애월읍 수산봉 기슭에는 1933년 청산 스님이 창건한 대원정사가 있다.

1948년 4ㆍ3당시 수산봉에서는 토벌대와 무장대간 치열한 전투가 치러졌다. 무장대에 입산한 스님을 사찰에 숨겨줬다는 이유로 당시 주지였던 고정선 스님은 토벌대에 의해 총살당했고, 사찰이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다. 

질곡의 시간을 지나 대원정사는 1961년 제주 법화종의 발상지가 됐다.

옛 문헌에 따르면 고려 정종 즉위년인 1034년 탐라국에서 파견한 사절단이 임금에게 특산물을 바쳤다.

당시 제주에서 방문한 사절단에게 팔관회를 관람하게 하면서 제주불교의 역사는 10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추정된다.

팔관회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돼 고려시대에 가장 번창한 국가 불교 의례였다.

고려시대에는 제주불교가 흥했는데 영실 존자암은 국성재(國聖齋)를 봉행,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다. 또 법화사와 수정사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산남과 산북의 사찰들을 관리하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이 됐다.

비보사찰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커다란 다툼이 일어날 곳에 미리 절을 지어 땅기운을 다스리고,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살기가 편한 ‘국태민안’을 염원하기 위해 세워졌다.

‘절 오백, 당 오백’이라는 옛말처럼 제주에서는 불교와 무속신앙이 성행했지만 조선시대 억불(抑佛) 정책으로 불교는 위축됐다.

1565년 곽흘 제주목사 때부터 불교는 탄압을 받았고, 1702년 이형상 목사에 이르러 불교의 맥이 끊어졌다.

제주불교계에서는 조선 중엽 약 200년 동안 ‘무불(不佛) 시대’에 접어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불교는 백성들의 삶에 스며들었다. 보시의 길은 척박한 바다와 오름에서 살아온 민초들이 관세음보살에게 의지해 온 간절한 정성이 엿보인다.

제주시 화북동은 1908년 관음사를 창건, 근대 제주불교를 일으킨 안봉려관 스님의 고향이다. 그는 일제의 억압과 통제 속에서도 제주불교 포교당을 신설했다.

이 노력에 힘입어 1930년대 이르러 관음사는 제주불교를 주도했고, 제주불교 활동의 근간이 됐다.

보시의 길 마지막 코스에 있는 삼양동 원당봉에는 불탑사(조계종), 원당사(태고종), 문강사(천태종) 등 각 종파를 대표하는 사찰 3곳이 들어서 있다. 

불탑사와 원당사는 마주해 있는 데 고려시대에 창건된 원당사(元堂寺)의 터에 1914년 재건된 사찰이 불탑사다. 원당사는 1920년대 새로 들어선 사찰이다.

원당봉(해발 170m)은 주봉인 원당악과 망오름, 도산오름, 동나부기, 서나부기, 앞오름, 펜안오름 등 7개의 봉우리와 3개의 능선이 이어져 있어 예로부터 ‘삼첩칠봉(三疊七峰)’이라는 명당으로 꼽혀왔다.

1300년(고려 충렬왕 26년)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간 고려 출신 기씨(奇氏).

황궁에서 일하던 기씨는 황제인 순제(1333~1370)의 차 시중을 들면서 총애를 얻어 후궁이 됐다. 황후 다나슈리는 채찍으로 기씨를 매질하고 인두로 지질 정도로 질투가 심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고려 여성이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과 모멸을 감내한 기씨는 드디어 기황후(奇皇后ㆍ1315~1369)에 올랐다. 독실한 불자인 그녀는 북두칠성의 명맥이 비치는 삼첩칠봉(三疊七峰ㆍ3개의 능선과 7개의 봉우리)에 탑을 세워 불공을 드려야 한다는 스님의 계시를 믿었다.

사신을 보내 제주시 삼양동 원당봉 중턱에 불탑사(고려시대 원당사)를 짓고 오층석탑을 건립했다. 이 같은 노력에 기황후는 1339년 태자 아유시리다라를 낳았다. 이 후 이곳은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의 성지가 됐다. 오층석탑은 제주 유일의 현존하는 고려시대 석탑으로 보물 1187호로 지정됐다.

기황후는 태자를 낳으면서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호령했던 대제국 원나라의 실권 황후로 등극했다. 기황후로 인해 원나라에는 고려의 풍속과 복식, 음식이 유행했다. 이를 고려양(高麗樣)이라고 하는데 기황후는 한류 바람을 일으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1368년 주원장이 이끄는 명나라 대군이 원나라 수도를 점령하면서 황실은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 중에 순제는 죽고 그 자리를 기황후의 아들의 이어받아 북원의 황제 소종이 됐다.

기황후는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응창부(應昌府)로 피난을 갔다가 포로가 돼 1369년 운명을 달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를 원나라의 한 지방으로 만들려는 소위 ‘입성론(立省論)’을 적극 막았고, 노예나 다름없던 공녀 송출을 중단시킨 것도 그녀의 업적이다.

당시 고려는 30여 년간 원나라의 침략에 맞서 항쟁했지만 사실상 원나라의 속국이 됐다. 그녀가 황후에 오르면서 오빠 기철은 대표적인 권문세족이 됐다.

기철과 친원파는 고려의 국정을 농단하고 전횡을 일삼았다. 이에 공민왕은 원의 영향력이 약해진 1356년 기철 일족을 비롯해 친원파를 대대적으로 제거했다.

집안의 멸족 소식을 접한 기항후는 원나라 군사 1만명을 보내 고려 정벌을 명했다. 이들은 평안도 지방까지 진출했으나 최영ㆍ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대패했다. 노비나 다름없던 공녀로 끌려가 대제국의 황후에 오른 기황후의 영광과 몰락은 불탑사 오층석탑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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