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원

사회학과 1

2010년 9월 G20 서울 정상 회의 폐막식에서의 한국 기자들을 기억하는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폐막 연설 직후 한국 기자들에게 따로 질문할 기회를 줬지만 단 한 명도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대학 수업만 봐도 한국 청년들은 질문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교수님들이 하시는 공통된 말씀이 있다. 2학기보다 1학기 수업이 더 어렵다고. 안 그래도 질문 안 하는 학생들이 1학기엔 더 경직 돼 있어 그 누구도 선뜻 질문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1시간이 넘는 수업을 온전히 홀로 이끌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신다.

필자 역시 수업 시간에 질문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많은 이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 같아 부담스럽고 다른 학생들은 모두 알고 있는 지식을 나 혼자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우린 궁금한 게 많았던, 그래서 질문도 많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린 넘치는 호기심을 해소하고자 질문을 하곤 했다. 필자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궁금한 게 참 많았다. 길바닥에 묻어 있는 검은 얼룩의 정체가 궁금해 어머니께 여쭙기도 했고, 수업 시간에 질문할 기회가 있으면 누구보다 빠르게 손을 들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수업 시간에 말수가 줄었고, 질문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생님, 교수님의 눈을 피하기 바빴다.

과거 우리 사회는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하는 사회였다. 주어진 해답을 암기하고, 답만 찾으면 됐다. 그러나 이젠 지식과 정보의 사회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쫓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 기회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누구나 ‘질문하라’는 말은 이제 지겨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모두가 질문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나 혼자 질문한다는 것은 쉽지 않음을 필자 역시 잘 알고 있다.

수업 시간에 질문도 하지 않는 필자가 이 글을 쓴 의도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질문의 부재를 깨닫고 속으로라도 질문을 떠올려보자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올바른 답이 있는 곳을 향해 스스로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우리가 왜 질문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려준다. 소크라테스는 답을 알려주지 않고 질문을 계속 던짐으로써 본인이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이처럼 질문을 통해 스스로 배움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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