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골짜기 / 김정배 / 한그루 / 2021

제주 BOOK카페  <17>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좋아하고,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아한다. 제주도에는 이야기가 많다. 마을지에 수록된 이야기들만으로도 재미있는 책을 여러 권 낼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하다.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그 이야기에는 사람들의 정신이 들어 있다.

이 책 『사라진 골짜기』의 이야기는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들었던 옛날이야기와 비슷하다. 아주 옛날에는 제주도에도 호랑이가 있어서 그 호랑이가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래서 한 스님의 도움으로 주문을 외워 호랑이를 사라지게 했다. 하지만 호랑이가 사라지면서 왕도 큰 인물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제주의 전설 중에서 아홉아홉골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다. 한라산에 호랑이가 없는 까닭을 섬사람들은 착한 사람들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웃끼리 서로 위하면서 산다면 큰 인물은 필요 없을 것이다.

왕이나 큰 인물이 나야만 자긍심이 생겨 좋은 걸까. 왕이나 큰 인물 없이 장삼이사가 모여 서로 사이좋게 살아가면 좋은 땅 아닐까. 큰 인물이 나오려면 호랑이로 상징되는 부정적인 요소도 동반된다는 뜻이 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

제주시에서 1100도로 가는 길에 천왕사가 있다. 그 천왕사가 있는 곳이 한라산 아흡아홉골이다. 아흔아홉골 천왕사 가는 길에는 스님의 사리를 모셔둔 부도가 있다.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모습이 삼나무 길에 부는 선선한 바람과 닮았다. 

천왕사 주변은 제주도의 단풍 명소이기도 하다. 천왕사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길이다. 오르거나 내려가는 길에 모퉁이 지나 산행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단풍나무와 잘 어울려 차분한 마음이 든다. 만약에 그 길도 넓혀 큰 계단으로 만들었다면 단풍나무숲의 풍경은 볼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과 잘 어울릴 때 오래 간다. 서로 어우러져 지낼 때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된다. 아흔아홉골에는 호랑이는 없지만, 호랑이 무늬 같은 단풍이 가을에는 붉게 익는다.

영웅담도 재미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우여곡절이 흥미로운 점은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라서 그럴 것이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후 행복하게 아주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끝맺는 마음, 그것은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의 소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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