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횡포 속 해녀 권익 보호 위해 항일투쟁 나서
해녀항일운동 정신 기르기 위한 다양한 사업 이어져
“국내 최대 여성항일운동 잊지 말아야”

해녀박물관 앞에 제주해녀항일운동 기념탑이 조성됐다.

“우리들의 진정한 요구에 칼로써 대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한다.”

올해는 제주해녀항일운동이 일어난지 90년이 흐른 해이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법정사 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과 더불어 제주도 3대 항일운동 중 하나지만 이를 온전히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1930년대 일어난 최대 규모 여성 항쟁으로 의미가 깊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고 있다. 

김효리(독일학과 3)씨는 “보통 제주 역사 투쟁을 물어보면 기억이 나는건 제주4ㆍ3 사건이다. 중ㆍ고등학교 시절 배우기도 했고 지속적으로 노출되다 보니 기억에 남게 됐다. 그러나 제주해녀항일운동은 교과서 속에도 언급되지 않고 미디어에서도 다루지 않다보니 소홀했던 것 같다.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젊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제주 도민도 이름만 들어봤거나 내용은 알지 못한다는 반응이 많았다. 제주에서 해녀로 활동 중인 장인숙(고내리 상군해녀)씨는 “대충 해녀들이 일본 사람한테 대항한 이야기로만 알고 있다. 자세한 건 모른다. 아마 서쪽 해녀들이 잘 알거다. 나는 동쪽 해녀라 그쪽 사람이 아니라 잘 모른다”며 당시 해녀항일운동지였던 제주 서쪽지역 해녀 종사자를 제외하고는 잘 알지 못할 것이란 반응을 보였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1931년부터 1932년 1월까지 연인원 1만713명의 해녀들이 283회에 걸처 궐기한 해녀항일투쟁이다. 제주도 해녀들은 과거에도 관리들로부터 노동력 착취와 수탈로 고통받아왔다. 1900년대부터는 해녀들이 수확한 해산물을 판매하는 판로가 개척돼 상황이 악화됐다. 악화된 상황을 모면하고자 1920년 4월 16일 해녀들의 권익을 보호할 목적으로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 설립됐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부터 일제는 조합장을 제주도지사가 겸임하는 어용조합으로 변질시켰고 일제의 횡포도 심해졌다. 

1930년 성산포에서 해녀조합의 일본인 관리들이 우뭇가사리의 시세를 무시하고 반값으로 매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31년 하도리에서도 턱없이 낮은 금액으로 수산물 가격을 책정했다. 해녀들은 이런 횡포에 대응하기 위해 해녀조합 대신 해녀회를 만들어 투쟁을 벌였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1931년 6월 해녀들은 공동 투쟁을 모색했다. 12월에 관제조합 반대, 수확물에 대한 가격 재평가 등의 요구 조건과 투쟁 방침을 정했고 대표자 3인과 대표위원 10명을 선출했다. 

당시 해녀들이 요구했던 사항은 다음과 같다. 일제의 지정판매 절대 반대, 일제의 계약보증금 생산자 보관, 조합 재정 공개, 미성년자와 40세 이상의 해녀들은 해녀조합비 면제, 출가증 무료화, 질병이나 다른 이유로 입어를 못하는 자는 조합비 면제, 마을별 총대 선출, 악덕 상인을 옹호하는 승전 서기 면직 처리, 도사의 조합장 겸직을 반대한다는 내용이다. 

시위는 1932년 1월 7일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시위대가 구좌면사무소까지 이르자 면사무소 지부장이 해녀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1월 12일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으며 마침 구좌면 지역을 순시하던 제주도지사 타구치 데이키가 탄 차량을 포위했다. 제주도지사는 이에 굴복했으며 해녀대표와의 담판 끝에 해녀들의 요구사항을 5일 안에 수용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일제는 1월 23일부터 사건의 조사와 함께 제주도 내의 청년운동가들을 배후세력으로 규정하고 하도리 오문규, 종달리 한향택과 한원택, 세화리 문도배와 문도후 등을 각종 죄목을 붙여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했다. 격분한 해녀들은 검속자를 탈환하기 위해 세화 주재소로 몰려들었고 급보를 접한 본서에서는 무장경관을 현장에 출동시켰다. 그 결과 해녀 34명을 포함한 50여명이 검속됐다. 1월 27일에는 종달리 해녀 100여명이 검거된 이들을 석방하라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나 이 시위를 끝으로 해녀항일운동은 일제에 의해 진압됐다. 이중 주동자로 낙인 찍힌 해녀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등은 옥살이를 하게 되고 이외에 검속된 해녀들만 100여명에 이른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일제 횡포에 저항해 싸운 항쟁 중 여성들, 그것도 사회적으로 천시받던 해녀들의 주도로 일어난 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이러한 제주해녀항일운동이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다양한 노력을 이어나가고 있다.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회(위원장 김태민)는 “나 역시도 이 과거사에 대해 완전하게 알지 못했다. 위원장이라는 직책이 있기에 많이 공부했다. 해녀항일운동 당시 해녀들은 15살, 16살 나이밖에 안 된 어린 소녀들이었다. 이분들이 주역이지만 그 뒤에는 서구 동맹이라는 청년 조직원도 가담했었다. 유공자가 12명으로 수사를 받았는데 여기서 해녀분이 3명이고 나머지 9명이 동맹원 소속 남자들이다. 나도 이런 정보들을 공부하고나서 알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회는 1995년도에 발족했다. 지금 27년째가 되고 있다. 지금은 과거 해녀항일운동 유공자를 발굴하고 소추사해서 과거사를 후세에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교육할 수 있는 전문적인 강사도 고용하고 해녀항일운동 관련한 웹툰도 제작하는데 예산을 투자하고 있다. 웹툰, 이비에스, 만화책 등을 학교에 자료로 나눠주고 힉셍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 중이다”고 말했다.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회뿐만 아니라 해녀박물관측에서도 제주해녀항일운동을 비롯해 해녀의 역사와 정신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해녀박물관은 북제주군과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회가 주관해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공원과 함께 조성됐다. 해녀뿐만 아니라 제주도 민속과 제주 여성들의 상징이기도 한 박물관은 해녀 관련 자료와 더불어 제주 여성의 삶이나 제주 민속 문화 도구를 수집하고 홍보하는 대표 기관이다. 

해녀박물관 권미선 학예연구사는 “올해로 90주년을 맞이해 기념사업회도 그렇고 도에서도 다양한 행사를 진행할 것이다. 박물관은 해녀항일운동을 소재로 해서 공연을 해보려고하고 특별 전시와 어린이 교육도 기획 중이다”며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제주 해녀들의 역사 중 한 분야이다. 그렇기에 많이 알리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 전시를 준비하고 유적지 탐방도 해보려고 하고 예전에 운동의 중심이 됐던 야학 강습소나 오일 장터나 경찰서 앞에 표지석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해녀항일운동이 일어난지 오래되기도 했고 그 당시 자료가 거의 없다. 증언하실 분들인 30~40년대생도 찾기 어렵다. 그래서 이제 방향을 틀어서 단지 해녀 항일 운동 유적지뿐만 아니라 세화리 둘레길을 위주로 해녀들의 길을 찾아 나가는 중이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박물관을 운영하며 느낀 해녀 정신에 대해 “해녀 정신은 해녀들의 공동체 문화이다. 해녀는 자신의 소속된 어촌계에서 규약을 따라 활동한다. 모든 행동을 할 때 단체 공동체 중심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해녀 항일운동이 현재 세 분의 지사만 주목받고 있다. 세 분이 운동을 나서서 했기 때문에 수감 기록도 있고 독립 유공자 포상이 돼서 지금까지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며 “그치만 박물관에서 전시를 진행해보면 기록되지 않으신, 이름이 없는 분들이 몇만회, 몇백회에 걸쳐 집회를 하고 시위를 뒤따르고 각 마을에서 단합한 것을 찾을 수 있다. 이게 바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해녀 정신이다. 그들끼리 단합하고 단체로 행동할 수 있는 정신이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 차원에서 해녀운동을 알리려면 사람들의 관심과 협조가 중요하다. 박물관측에서 행사를 많이 하지만 참여자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다. 젊은 학생들이 참여하는 건 거의 보지 못했다. 이런 잊지 못할 제주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고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요즘에는 SNS를 활용한 소통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박물관에서 SNS 홍보를 활발하게 하지는 못했다. 우리도 모자란 부분이기도 하다. 유튜브든 인스타든 젊은 학생들이 SNS를 통해 소식들을 알린다면 젊은 세대까지도 관심을 퍼져나가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제주해녀항일운동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마음을 전했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미디어에서도, 역사 교과서에서도 제대로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기억해야 할 소중한 제주의 역사 중 하나이다. 개인의 희생과 투쟁이 담긴 역사가 잊혀지지않도록 제주도민, 더 나아가 국민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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