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서 1023명 사망… 굶주림 속 중노동에 시달려
제주에 노동자상과 위령탑 조성… 희생자들의 넋 기려

2009년 서귀포시 대포동 약천사 부지에 조성된 태평양전쟁희생자 위령탑.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난항’

한일 관계가 경색된 결정적 계기였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앞서 대법원은 2018년 10월과 11월 전범기업인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증공업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확정했다. 이들 기업의 배상 거부로 피해자들은 최근 해당 기업의 국내 자산을 매각해 현금화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반면,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배상 문제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체결 당시 우리 정부에 제공한 총 5억달러 상당의 유ㆍ무상 경제협력을 통해 “이미 해결됐다”며 우리 대법원 판결을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일 정부 당국과 전문가들은 일본 전범기업의 한국 내 자산이 실제로 매각 및 현금화될 경우 양국 관계 또한 파국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양국 관계에 최악의 상황을 몰고 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한국과 일본 정부는 이른바 ‘강제동원 피해자 명예회복 기금’을 조성,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300여 명에게 1인당 1억원의 보상금 지급 방안을 조율 중이다.

▲일제, 전쟁 수행에 제주도민들 강제 동원

태평양전쟁(1941~1945) 당시 제주도는 일제의 군사기지로 전락했다.

일제는 패망하기 직전까지 동굴진지를 구축, 온 섬을 요새화했다. ㈔제주도동굴연구소(소장 손인석)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에 구축된 동굴진지는 120곳에 448개로 확인됐다.

성산일출봉과 모슬포 송악산, 조천 서우봉, 고산 수월봉, 서귀포 삼매봉 등 해안에는 해군 특공대기지가 들어섰고, 미군 상륙 함정을 공격할 자살보트 ‘신요(震洋)’와 인간 어뢰 ‘카이텐(回天)’을 숨겨놓았다.

오름에는 위장진지, 전진거점진지, 주저항진지 등 전술적 용도로 구분됐다. 복곽진지는 항복하지 않고 마지막 1인까지 남아 옥쇄(깨끗이 죽음)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구축됐다.

일제는 본토를 방어하기 위한 마지막 거점으로 제주도를 선택했다. 7만4781명의 병력을 배치하는 ‘결7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도내 곳곳에 동굴진지를 파놓았고, 비행장도 4곳이나 만들었다.

제주도민 중 젊은이들은 전쟁터와 동굴진지 구축을 위한 노무자로 강제징용 당했다. 노인과 학생은 비행장 건설에 동원됐으며 농민들은 식량 공출로 수탈을 당하는 등 전쟁 수행에 많은 도민들이 동원됐다. 강제 동원된 많은 도민들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지금도 피해 신고 못한 유족들 많아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신고 접수된 제주지역 강제징용 피해자는 총 2890명으로 집계됐다.

그런데 국가기록원의 일제 강제연행자 명부에는 제주지역에서는 7540명이 동원됐고, 이 중 1023명(14%)이 사망했다. 이를 볼 때 피해 신고를 못한 유족들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2017년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 기념 학술세미나에서 당시 조성윤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현 명예교수)가 이 같은 내용을 발표했다.

조 교수에 따르면 사망자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이유는 제주 출신들은 타 지역보다 해상활동에 더 적합하다는 이유로 해군 소속 군인 또는 군속으로 많이 끌려갔기 때문이다.

강제 동원자 가운데 111명은 최전선인 남태평양 제도에 끌려갔다. 이들이 끌려간 섬은 페릴리우섬(1명), 파라오섬(1명), 괌(2명), 사이판(3명), 티니안섬(1명), 트럭섬(1명), 동카로린제도트럭섬(1명), 도라쓰구섬(1명), 미레섬(2명), 마셜군도 윗제섬(12명), 우오쓰제섬(1명), 남태평양군도(1명), 동부뉴기니(14명), 길버트 타라와(7명), 솔로몬 군도(2명) 등이다. 이 외에 필리핀(23명), 보르네오(2명) 등 동남아시아로도 강제 징용됐다.

길버트제도에 있는 섬인 타라와와 마킨섬 등 미군이 태평양제도로 진격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작전상 요충지였고, 제주출신들이 다수 동원됐다.

조성윤 교수는 “동원된 제주출신 노동자들은 매일같이 비행장 건설과 참호 구축 등에 동원돼 중노동에 시달린 것으로 기록됐다”고 밝혔다.

마셜군도 윗제 환초로 끌려간 이공석씨의 수기에서는 미군의 폭격 후 고립돼 풀죽으로 연명했다고 밝혔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일부 사람들은 죽은 시신에서 인육까지 먹었다고 기록했다.

이공석씨와 제주에서 함께 출발한 동료는 58명이다. 이 중 26명(45%)만 살아서 귀환했다.

조상윤 교수는 “제주지역 강제징용 노동자들은 미군과의 직접적인 전투가 예상됐던 길버트제도와 솔로몬제도로 끌려가거나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군도, 타라와 등 일본군과 미군이 격전을 벌였던 전장에도 있었다”고 말했다.

▲강제징용의 역사 기억해야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상은 민주노총 주관으로 2017년 12월 7일 제주항 제2부두 입구에 건립됐다.

노동자상은 강제동원 된 제주도민과 노동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조성됐다.

평화의소녀상을 만든 김운성ㆍ김서경 작가가 제작한 약 2m 높이의 노동자상은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깡마른 몸인 노동자가 한 손에 곡갱이를 든 모습이다. 오른쪽 어깨에는 자유를 향한 갈망을 뜻하는 작은 새가 앉아 있다.

앞서 2009년에는 일제 강점기 징병이나 징용으로 희생된 원혼을 달래기 위한 태평양전쟁 희생자 위령탑이 서귀포시 대포동 약천사 들머리에 세워졌다.

약천사가 제공한 661㎡의 터에 제주도가 지원한 5억원의 예산을 들여 건립된 위령탑은 높이 14.5m 규모로, 조각가인 임춘배 제주대학교 교수가 스테인리스 스틸을 사용해 제작했다.

위령탑은 기단부에 태평양을 상징하는 물이 고이고, 한쪽으로는 바닥을 향해서 물이 흐르도록 해 희생자들의 한이 서린 눈물을 형상화했다.

위령탑 기둥에는 육대주를 상징하는 사람 머리 모양의 조각상 6개가 하늘을 향해 양손을 뻗어 인류의 평화를 염원하는 모습이며, 탑의 정상부에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가 태평양을 내려다보는 형태를 띠고 있다.

위령탑 옆에는 탑의 건립 취지를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4개 국어로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제주도지부는 일제가 진주만을 공습했던 12월 8일마다 위령탑에서 위령제를 봉행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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