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예원

편집국장

최근 엄청난 흥행을 몰며 각종 인터넷매체 인기순위를 차지한 드라마가 있다. 바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다. 

드라마 속 ‘우영우’ 캐릭터는 자폐스펙트럼을 지닌 장애인, 자폐아로 등장한다. 우영우가 자신을 소개하는 방법을 이렇다. “제 이름은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입니다.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별똥별, 우영우” 우영우를 통해 사람들은 장애인도 차별받지 않고 함께 사회를 살아가야한다는 따스한 시선을 던진다. 

놀랍게도 나는 이런 훈훈한 분위기에서 최근까지 비난받던 장애인 시위 현장이 생각났다. 왜 우영우는 흥행하는데 현실의 우영우는 비난받는가.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현실에는 ‘우영우’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드라마 속 우영우는 어리고, 예쁜 여성이 귀엽고 똑똑한 장애인의 모습으로 나온다. 서울대 로스쿨 수석인 두뇌와 한 눈에 봐도 예쁜 얼굴,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하며 가끔 하는 엉뚱한 행동도 그저 귀엽다고 받아들일 정도이다. 

하지만 현실에는 어리지도, 예쁘지도, 귀엽지도, 똑똑하지도 않은 장애인이 존재한다. 결정적으로 우영우는 비장애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그들의 인정 범위 내에 속하게 된다. 

지하철 4호선 장애인 시위 관련 기사들에 온갖 혐오표현으로 가득찬 이유 중 하나는 장애인들의 권리를 위해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때문이었다. 귀엽지도 않은 ‘우영우’가 비장애인의 심기를 거슬렀으니 욕을 먹어 마땅하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모두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방법은 장애인이 본인의 불편을 감내하는 것 뿐이다. 

세상에는 당연히 주어지는 권리를, 자유를, 투쟁으로 얻어야 하는 자들도 있다. 자신의 권리를 평생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피해자가 굳이 선의의 투쟁만을 이어나갈 필요가 있을까? 그렇기에 나는 그 시위를 마냥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이해하고 싶었다. 내가 겪은 오늘의 불편이 그들에게는 일상같은 불편이었을테니 말이다. 그들보다는 그들을 배제시킨 사회가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다 생각했다. 

드라마와 현실 간 괴리가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드라마가 현실과 다르게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귀엽고 예쁘고 멋진 하나의 캐릭터일 뿐이다. 이제는 현실의 ‘내’가 드라마 속 캐릭터가 아닌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됐는지 묻고 싶다. 

진정으로 드라마 속 장애인 캐릭터에게 공감이 갔다면 이제는 현실에서도 그들과 함께 갈 때가 아닌가 싶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첫 번째 단계다.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그들을, 귀엽지 않은 우리 현실의 우영우를 혐오의 눈빛이 아닌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봐줬으면 한다. ‘우영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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