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54년간 아픔을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아픔은 한이 되어 우리의 가슴 속에 남아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시작의 계절 봄, 그 4월에 제주의 수많은 양민들이 빗발치는 총성 속에 사라져 갔다.

  54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아픔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4·3은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 통한과 설움으로 남아있다.

  본교 총학생회(회장 양정환 국어교육4)와 제주교대 총학생회(회장 손영복 수학교육4)가 공동 주최한 ‘4.3 진상규명과 정신계승을 위한 유적지 순례’가 1백50여 명의 학생과 도민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 달 31일 관덕정에서 시작된다.

  4·3의 시발점인 곳인 만큼 엄숙하게 4·3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의지로 ‘4·3 봉기가’와 ‘잠들지 않는 남도’ 등의 노래가 울려퍼졌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의 참여의지가 부족해 아쉬움을 남긴다.

  집결지인 관덕정을 벗어나 한림, 모슬포 등지에서 예비 검속에 의해 검거된 사람들이 무차별 학살된 섯알오름으로 향한다. 4.3 진상조사가 한창인 지금 예년과는 뭔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든다.

  한적한 농촌 마을의 조그만 오솔길을 따라 걸어들어가 도착한 그 곳. 그러나 그 곳에선 변화를 찾아 볼 수 없다. 우리는 그 곳에서 백조일손유족회에서 세워 놓은 ‘양민학살터’라는 팻말 외에 작은 것이나마 또 다른 4·3의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유적지를 나타내는 무언가는 더 이상 없다.

  54년이 지난 지금 그 곳에서 그 날의 아픔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크게 파여 녹슨 철근과 유채꽃만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학살터 앞에서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이 곳에서 학살 된 양민들은 이송 과정에서 자신의 죽음을 감지하고 진입로부터 신발을 한짝 씩 벗어 유족들이 시신수습을 수월하게 하도록 도왔다. 허나 시신들을 발견했을 때는 누구의 시신인지 구분할 수가 없어 넓은 묘역에 한꺼번에 시신을 안장했다는 백조일손지지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다시 한번 그 날의 참담함을 느낀다.

  버스로 얼마간 이동한 후 도착한 곳은 무등이왓이다. 도착한 순간 허탈감마저 든다. 이 곳이 과연 유적지란 말인가. 한창 공사중인 관계로 무등이왓을 설명하는 표석조차 볼 수 없다.

  4·3이후 제주에서 사라져버린 마을. 그 곳은 말 그대로 초토화였다. 54년 전 잠복사살이라는 비인간적 만행이 자행됐던 곳.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소박하게 농사를 짓고 살던 시골 마을은 이제 무성하게 자란 대나무를 보며 마을이었음을 짐작할 뿐 더 이상 마을이 아니다.

  이 곳에선 집단 학살 뒤 시신을 찾을 수 없어 죽은 이의 옷가지들을 모셔 만들었다는 헛묘가 곳곳에 보인다. 이렇게라도 자신의 부모·형제를 떠나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아픔이 오죽했으랴. 유족들이 숨죽여 지내 온 울분의 세월을, 죄 없이 억울하게 죽어야 했던 희생자들의 억울함을 우리는 어찌 보상해야 한단 말인가.

  마지막 순례지는 사람들에게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만뱅듸 묘이다.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제사가 진행되지만 일부 참가자들이 전화 통화를 하고 웃고 떠드는 등 엄숙함을 찾아보기 힘들어 아쉬움을 남긴다.

  제주통일청년회 준비위원회 양희선 회장은 “진행하는 이들도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하지만 참석하는 사람들 또한 사전공부와 경건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유적지 순례의 참 뜻을 기릴 수 있다”라고 말해 유적지 순례에 참여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게 한다.

  유적지 순례를 마치며 손영복 학우는 “4·3에 대해 잘 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더 잘 알기 위해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며 “오늘 순례를 통해 직접 경험하는 것과 그렇지 않음의 차이를 느꼈다”고 말한다. 또”순례 진행과 장소 설명이 4·3을 피부로 느끼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며 아쉬움을 나타낸다.

  이번 유적지 순례를 통해 우리는 제주사의 아픔을 보았다. 또 4·3 특별법이 제정되고 진상조사가 이뤄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들이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음을 느낀다. 우리의 관심과 진상규명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만이 무참히 죽어간 그들의 영혼을 달래줄 수 있다.

  올해 유적지 순례는 참여율 저조와 진행자의 설명 미흡 등으로 아쉬움을 남긴다. 좀 더 활성화된 홍보와 체계적 준비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여전히 4·3은 일부만의 얘기로 여겨지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런 인식을 바꾸는데 눈으로 직접보고 느낄 수 있는 유적지 순례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4·3은 더 이상 빨갱이 폭동으로 치부되는 과거의 일도, 일부의 얘기도 아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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