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시 해안동에 위치한 '리생이'

사월이다. 들판에 가득한 꽃을 보면서 봄이 한창 무르익어 감을 느낀다. 화창한 봄날 이맘 때, 바로 54년 전 꽃들이 핏빛으로 물들었던 4·3.

  많은 이들이 아픈 상처를 지니고 그 당시를 기억하고 있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젊은 세대들은 경험하지 못한 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지내는 게 사실이다. 자칫 잊혀져 버릴지도 모르는 4·3이 우리의 문제라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후대들이 이것들을 통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

  제주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이하 4·3 도민연대) 주최 ‘4·3 역사순례-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가 지난 7일 학생과 도민 1백6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됐다.

  ‘잃어버린 마을’은 4·3 이후 소실되어버린 마을이다. 제주도에는 각 단체마다 기준을 다르게 두기 때문에 개수는 정확하지 않으나 소규모까지 따지자면 약 1백여 개가 있다고 한다.

  봄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처음으로 간 곳은 제주시 해안동에 위치한 ‘리생이’이다. 이 곳은 밭농사와 목축을 생업으로 평화롭게 살던 마을이었는데 1948년 11월 20일 소개령이 내려져 주민들이 미처 가재도구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학살당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마을로 돌아오지 않아 지금은 잡초가 우거지고 빈 집터엔 대나무만이 지나간 역사를 얘기하고 있었다. 비석 주위 곳곳엔 제주도 집 앞 골목인 ‘올레’의 흔적이 있어 조금이나마 옛 마을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간 곳은 북제주군 애월읍에 위치한 ‘자리왓’이다. 그 곳에 도착해 보니 촌장들이 앉아서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했을법한 팽나무와 밭담 사이로 자그맣게 남아 있는 올래의 모습이 보였다.

  마을터 곳곳에는 대나무 밭이 무성했다. 과거에는 생필품을 대나무를 이용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대나무가 있는 곳은 집이 있었던 곳이라 한다. 지금은 비록 사라졌지만 옛 마을의 형상을 보니,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숲 속에서 서러운 옛이야기가 들리는 듯 했다.

  점심 식사를 하고 우리들은 한림읍 명월리 ‘빌레못’으로 이동했다. 빌레못이란 돌빌레 위에 못이 형성된 곳으로 옛날에는 식수와 우마 먹이는 물로 사용됐다.

  1948년 11월 20일 소개령에 의해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명월리는 풍수지리학적으로 기가 센 지역이어서 희생과 피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연못터와 대나무만이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곳에는 비석 세 개가 있었는데 4·3때 희생당한 분들의 시신을 찾을 수 없어서 세워 놓았다고 한다.

 ◆ 안덕면 동광리 '삼밭구석(마전동)'.
    마을 주민들이 세운 표석에는 54명의 희생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다음 장소인 안덕면 동광리로 이동해 ‘삼밭구석(마전동)’을 찾았다. 삼밭구석은 팽나무와 넓은 마을터로 옛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마을 중앙에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묵묵히 마을을 지켜봤을 두 그루의 팽나무는 고풍스럽기까지 하다.

   삼밭구석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도민연대 관계자에 따르면 4·3으로 인해 삼밭구석을 이루던 3개의 마을이 없어졌고, 주민들은 다른 곳을 옮겨다니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삼밭구석의 표석은 앞에서 봤던 것들과 모양이 달랐는데, 마을 주민들이 사비를 털어 세웠다. 표석 뒷편에는 54명의 희생자 명단이 있는데, 마을의 규모가 컸던 만큼 많은 학살이 있었다. 그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생각하니 지금도 몸이 떨리는 듯하다.

  동광리에서 삼밭구석을 보고 나와 근처에 있는 ‘헛묘’도 돌아봤다. 4·3 후 시신이라도 찾아 장례라도 치러야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후대들이 헛봉분을 만들었다.

  아홉개의 묘지 주변에는 햇살을 듬뿍 머금은 노란 유채꽃 더미가 있었는데 묘지와 꽃이 무척 대조적으로 보였다. 시신을 찾지 못해 헤매이다 이 묘를 만들었던 사람들의 심정이 얼마나 절박했을지 느껴졌다.

  유적지 순례의 마지막 장소인 애월읍 유수암리 ‘거문덕이’는 옛 마을의 형태가 남아 있었지만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진 않았다. 그 곳의 명칭은 원래 금덕리였는데 4·3 때 군인들에 의해 불에 타, 마을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결국 거문덕이와 가까운 유수암리에 모여 살면서 명칭이 바뀐 것이라 한다. 현재 마을에는 당시 축성을 해서 경비를 서던 ‘동문’ 터에 주민들이 세운 표석이 있다.

  예전에는 옹기종기 모여 평화롭게 살았을 마을이 4·3에 의해 불타버리고,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깝다.

  이번 4·3 유적지 순례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유적지를 보여주고자 해서인지 체계적인 설명이 부족했다. 김재령(제주제일중 교사, 40)씨는 “학생들에게 4·3에 대해 일깨워 주고 싶어 이번 행사에 참여하게 됐는데, 그 당시 상황이나 원인을 이해할 수 있는 안내 설명이 많이 부족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4·3순례는 오랜 침묵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상흔을 치유하기 위한 작업이라 여겨진다.

  고덕만(공무원, 42)씨는 “이 곳에 와서야 잃어버린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앞으로 유적지들을 더 찾을 뿐만 아니라 꾸준히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4·3은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지만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이런 역사의 현장은 잘 개발하고 지속적으로 보존 관리하여 후대들에게 인식시켜야 할 교육의 장이다. 다시는 이 땅에 4·3과 같은 비극이 반복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스스로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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