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을 얘기할 때면 늘 나는 11살 소년이 된다.”

  쉼 없이 흐르는 시간을 거슬러 다다른 그 곳, 그 곳에는 아물지 못한 상처가 쓰라린 아픔을 품고 잠들어 있다. 김홍석(65)씨에게 4·3은 과거의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몸 구석구석에 각인 된, 지울 수 없는 상처이다.

  오늘도 그는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 하나 꺼내 놓는다. 반세기를 훌쩍 넘어 온 기억들은 그의 눈앞에서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토벌대의 급습으로 마을은 이내 형체를 잃고 검은 연기를 뿜어낸다. 순식간에 삶의 터를 잃은 주민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숨을 곳을 찾는다.

 ◆ 충혼묘지

 산사람들과 군경간의 보복 공격이 이어지고,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이 휘두르는 총칼에 쓰러져 간다.

  만삭인 어머니가 그에게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도망가라”고 외친다. 머뭇거리는 그의 등을 어머니는 있는 힘을 다해 밀어낸다. 정신없이 뛰는 그의 귓가에 총성이 울린다. 동생들이 쓰러진 눈길은 핏빛으로 물들고, 어머니의 울부짖음이 허공을 메운다.

  그가 두 눈 가득 부풀어 오른 눈물 망울을 훔친다. 손길을 따라 눈가 주름 사이로 번지는 눈물.

 ◆ 무장대가 묻힌 무덤

 어머니와 4살 난 동생도 토벌대에게 끌려간 후 곧 총살됐다 한다.

  매일 아침, 여섯 살 난 손자의 잠든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동생을 업고 다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그럴 때면 그는 ‘고향의 봄’을 흥얼거린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마지막 구절에 다다르면 그의 눈은 늘 젖어 있다. 어머니 품이 그립거나 동생들이 보고싶을 때 그는 ‘고향의 봄’을 부르며 산에 오른다.

  ◆ 현희합장묘

  가족을 잃은 슬픔의 끝에서 그를 기다리는 건 혹독한 수감 생활이다. 추위에 피부가 트는 것은 예사이고, 여자들은 무방비 상태로 발가벗겨진다. 삶은 밀과 마늘 냄새만이 가득한 죽은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함께 사용하는 변소라고 해봐야 30여 평 정도의 구덩이 하나가 전부이다. 죽음의 경계선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들. 빨갱이라 불리는 그들에게 수줍음은 사치일 뿐이다.

  먼 친척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석방된 그는 다니던 학교에 복학하고, 10년만에 국민학교 졸업장을 받는다. 계속되는 궁핍함도 견디기 힘들지만, 무엇보다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현실이 그의 어깨를 움츠러들게 한다.

  그가 작은 한숨을 내뱉으며 달아오른 얼굴을 한 번 쓸어 내린다. 아픔으로 점철된 세월의 무게가 거친 손등 위로 고스란히 내려앉는다.

  4·3의 족쇄는 ‘연좌제’라는 끈으로 이어져 그의 아내와 자식들마저도 옭아맨다. 연좌제로 인해 공무원 시험을 치를 수 없었던 큰 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그의 가슴은 미어진다. 끝내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눈에 또 다시 눈물이 그렁하다.

 ◆ 의귀초등학교

 그는 4·3 특별법 제정이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보상법이 마련되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다.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에는 보상의 절차가 뒤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가 바라는 보상은 개개인에게 지급되는 얼마의 돈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4·3의 진실을 되새길 수 있는 4·3공원이 조성되고, 희생자들의 이름 석 자가 위령탑에 새겨지기를 바란다. 그래야 후에 부모님과 동생들을 만날 때 웃으며 손을 맞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직도 그는, 우리의 부모는 빨갱이라는 수식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도민 학살을 정당화시키고 감추기에만 급급했던 행정 당국의 태도는 그의 상처를 깊게 한다. “그렇다면 9백 명 넘게 희생된 10살 미만의 어린 아이들도 공산 폭동에 가담했다는 이야기인가”, 한층 높아진 그의 목소리에 마음 한 켠이 저릿하다.

 ◆ 높은 머루

 아직도 4·3은 섬이라는 그늘에 갇혀 진실의 소리를 높이지 못하고 있다. 4·3은 전도민의 아픔이다. 그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기에 급급한 현실이 안타깝다. 이제는 서로가 마음을 열고 화합해야 할 때임을 힘주어 말하는 그.

  “나는 촌로에 불과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젊은이들에게 그 동안 가슴 속에 담아왔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그의 입가에 살포시 번진 미소 속에는 오래된 상처의 흔적만큼이나 진한 희망의 내음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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